동네 개 찬차

아르헨티나, 엘 깔라파떼: 동네 산책 - 2015/05/17(일)

by 민경화

엊그제 깔라파떼에 도착했을 때 터미널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왔던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이름은 ‘찬차’다. 녀석의 이름이 찬차라는 것은 매력적인 짧은 금발 머리를 한 호스텔 관리인으로부터 들어 알았다. 유난히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은 터미널과 호스텔을 오가며 숙식을 제공받는 단다. 녀석이 어릴 때부터 쭉 지켜봐 왔던 호스텔 관리인과 그녀의 부인(?)인 터미널 직원은 사랑스럽고 에너지가 넘치는 개구쟁이 개에게 ‘찬차’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며 동네 사람들과 ‘찬차’의 생활을 공유하고 있단다. 호스텔 관리인은 찬차랑 우리 아이들이 터미널에서 함께 노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가 있는 것을 이미 보고는 우리에게 찬차 자랑을 늘어놓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실 찬차의 외모는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다. 시커먼 얼굴 때문에 탐지견이나 맹견처럼 보이는 잡종견인데 하는 짓이 정말 사랑스럽다. 사람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함께 걸을 때면 괜히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어 자기 몸을 사람에게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앞서 가버린다. 동네에서 우연이라도 우리를 발견하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손등을 핥으며 반가워해주고, 자기도 떠돌이 개면서 우리에게 컹컹대며 달려드는 다른 떠돌이 개가 있을라치면 쫓아가 더 큰 소리로 컹컹대며 응징해주곤 했다.

오늘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호수 산책을 가기 위해 숙소를 나왔더니 그 개 찬차가 우리를 따라왔다. 동네 주민을 대동하기라도 한 듯이 마음이 든든하다.

언덕 위 호스텔에서 읍내와 터미널로 통하는 왼쪽 길의 반대쪽인 오른쪽 길로 내려가니 말 농장이 있고 맞은편에 공원묘지가 있었다. 흰색으로 칠해진 공원 벽과 묘비, 작은 건물에 꽃과 사진으로 밝게 꾸며진 이곳은 죽은 자의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기보다는 예쁜 정원 같은 분위기다. 우리네 묘지와 달리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그 동네의 일부처럼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화사한 분위기의 공원묘지는 혐오시설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999F5A3359F5FC8008AF8D 숙소에서 읍내와 터미널로 향하는 내리막 길. 아침에 이 길을 걸을 때면 뒤로 비치는 아침해가 우리 그림자를 길게 늘여주곤 했다.
997CEA3359F5FE982148DF 공원 처럼 예쁜 마을의 공동묘지
99271C3359F5FE9B269CDD 공동묘지 바로 앞의 말 농장


그 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어 내려가니 키 큰 가로수 길에 드문드문 주택들이 이어져 있었다.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기도 하고 나무에 고무 타이어 그네를 매달아 놓고 그네를 타며 노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주말이라고 바리바리 짐 싸들고 막히는 고속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겠다. 느긋하게 일요일을 즐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살짝 부럽다.

주택가를 벗어나자 바람이 차가워지더니 곧 빙하 물이 흘러와서 만들어진 검은색에 가까운 짙푸른 호수가 펼쳐졌다. 빙하 골짜기를 훑고 온 바람이라서 그랬을까,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바람이 호숫가를 걷는 내내 우리 몸을 뒤로 밀어젖혔다. 우리를 따라온 찬차는 호숫가에 도착하자마자 그 차가운 호수에 뛰어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물놀이 삼매경에 빠졌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지켜보고 있자니 우리 쪽으로 달려 나와서는 몸을 부르르 떨며 털에 묻은 물을 우리에게 털어냈다. 녀석을 피해 달아나자 장난기가 발동해서는 신이 나서 땅을 박차며 우리를 따라 달려온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마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호숫가에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근사한 놀이터가 있었다.

찬차는 미끄럼틀 위까지 따라 올라와서는 우리보다 앞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 마치 이렇게 하는 거라고 우리에게 시범이라도 보이는 듯이. 녀석과 함께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가 기울기가 45도에 가까운 스릴 만점의 시소를 발견했다. 분명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였는데, 시소 한쪽이 아래로 향해있을 때 그쪽으로 올라타고 나면 반대쪽이 하늘 높이 올라가 있어서 그쪽에 올라앉을 수가 없었다. 어른인 내가 한쪽에 다리를 걸치고 서서 반대편의 높이를 최대한 낮추어 주어도 형주가 다리를 뻗어 올라탈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방법을 총동원해서 형주가 간신히 매달리듯 힘겹게 올라앉아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탈 수 있었는데, 시소가 어찌나 높이 올라가는지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를 타는 것보다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도시를 갈 때마다 동네 놀이터의 시소를 유심히 살펴보곤 했는데 대부분 45도에 가까운 급경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낮은 경사에 좌석 아래 스프링까지 달린 심하게 안전한 동네 시소를 볼 때면 스릴 만점이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시소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990B063359F5FE9E38EB78 공동묘지와 말 농장 사잇길, 그길 끝에 있는 호수
99F98E3359F5FEA409EC1A 우리와 함께 놀이터를 즐기고 있는 찬차
99D95A3359F5FEA61C0FE4 땅바닥과 의자에 충격 완화 장치가 전혀 없는 급경사의 스릴 만점 시소

놀이터를 지나 시내방향으로 호숫가를 걷다 보니 호수에 연 다홍색 플라밍고 대여섯 마리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동물원이 아닌 자연에서 보는 최초의 플라밍고였다.

“우와, 예쁘다”

아이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찬차가 호수로 첨벙 뛰어들더니 허우적허우적 개헤엄을 쳐서 플라밍고 있는 곳으로 가서는 겅중겅중 거리며 플라밍고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다시 물 밖으로 나와서는 부르르 몸을 떨며 차가운 물을 우리를 향해 털어냈다. 그러고는 ‘나 멋지지?’ 뭐 그런 표정으로 형주와 나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또 스윽 몸을 문지르고는 앞장서간다.

찬차, 녀석 덕분에 오늘 하루가 더 특별해졌다.


99A9303359F6008A288A88 호수에 뛰어 들어가 플라밍고를 쫓는 찬차
99D1CC3359F6008D367AB3 호수에서 마을로 돌아 가는 길
996B4A3359F6008F2D54A6 숙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저녁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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