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여, 고맙습니다.

아르헨티나, 엘 깔라파떼(칠레국경파업 5일째)- 2015/05/24(일)

by 민경화

한 여행지에서 오래 머물며 익숙한 거리를 걷고 익숙한 이웃들을 하나둘 만들어가는 일은 분명 즐겁고 기분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떠나야 하는 날을 넘겨가며 떠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상황에서의 익숙함은 불안함만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마냥 숙소에 있을 수만은 없어서 동네 주민들이 이용하는 식당에 들러 닭고기 요리와 샐러드, 음료를 주문해 먹고 목적도 없이 상점들을 구경하며 온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9959AD3359F5E6C40D9ACA 여행사 앞 재활용품으로 만들어진 모험가. 자전거를 대여하러 갔는데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99E8793359F5E6C71A1F8D 메인 도로 입구에 새워진 흉상. 돈 보스꼬라는 존경받는 성직자.
9974C63359F5E6CA0AA378 거리에서 만나는 동네 개들은 모두들 의외로 깨끗하고 다정했다.
9965AD3359F5E6CF2A06D7 숙소 아래 주택가


그러다 음반가게 앞에서 ‘남미의 목소리’로 칭송받는 ‘메르세데스 소사’의 CD를 발견했다. 그녀의 대표적 노래는 ‘Gracias a La Vida’(인생이여, 고맙습니다)이다.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흰 것과 검은 것,

높은 하늘의 많은 별, 그리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또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빛나는 두 눈,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중략)‘

우리나라 가수 패티 김을 연상케 하는 카리스마와 인생의 연륜이 느껴지는 인디오 여가수의 목소리와 모습에 매료되어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땅고 가수들의 노래에서는 세련된 유럽의 분위기가 느껴졌다면 소사의 노래에서는 투박하고 거친 인디오의 감성이 느껴졌다. 1959년에 데뷔한 그녀의 인생역정은 아르헨티나의 정치 역사와 그 궤도를 같이 한다. 민속 음악을 주로 하던 그녀는 1979년 공연 도중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추방되었고 이후 1982년에 귀국하여 2009년 사망하기까지 왕성하게 활동하여, 아르헨티나를 넘어서 남미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녀의 음악에 매료되어 음반가게를 지나치지 못하는 나를 아이들이 잡아끌었다. 아이들이 좀 더 커서 이런 음악도 함께 공유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아쉬움을 삼키며 다시 길로 나섰다.


99A8733359F5E6F925E370 음반가게 쇼윈도에 전시된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반들


이제는 습관처럼, 숙소를 나선 아침에 한번, 숙소로 돌아가는 저녁에 한번 버스터미널에 들러 칠레 국경 상황을 확인하곤 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국경이 열렸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저녁에 버스터미널을 들렀을 때 창구에서 우리만큼이나 절박한 표정으로 창구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커플을 만났다. 브라질에서 왔다는 두 사람은 칠레의 뿐따 아레나스에서 산띠아고로 가는 내일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칠레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남미의 비행기 티켓은 상당히 비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구매하려고 인터넷에서 수개월 전에 티켓을 예매하는데, 문제는 그런 티켓은 변경이나 취소, 환불이 불가하다는 점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절박한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그들이 알아본 바로, 버스로는 칠레 국경을 통과할 수 없지만 택시나 자가용으로 아르헨티나 국경을 통과한 후 칠레 국경 바로 앞에서 내려서 걸어서 칠레 국경을 통과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이건 호스텔에 발이 묶여 칠레 국경을 넘지 못하는 수많은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얻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였다. 내일 새벽 택시를 타고 국경을 넘을 계획이라는 그들의 여행에 우리도 동행하기로 했다. 간단한 에스파뇰을 구사할 수 있다는 그들이 택시 회사를 접촉해서 예약을 하겠다고 해서 우리 호스텔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숙소로 돌아와 그들의 전화를 기다렸다. 서둘러 저녁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꾸리고 있자니 그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섯 명이 타고 갈 수 있는 크기의 택시를 예약했고 아침 8시에 출발 예정이란다.

드디어, 내일이면 칠레로 간다!

Gracias a La Vida!(인생이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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