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出) 아르헨티나 기(記)

아르헨티나 엘 깔라파떼에서 칠레 뿌에르또 나딸레스로 이동-15/05/25

by 민경화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는 흐릿하고 아련하게 기억되지만, 오래 머물러 익숙해진 여행지는 또렷하고 아쉽게 기억된다. 예기치 못하게 2주 가까이 지내며 속속들이 알게 된 엘 깔라파떼의 동네 풍경 속에서 머무는 내내 떠나갈 날만을 학수고대했었는데, 막상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발치에 매달린다.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고, 그동안 정들었던 호스텔 직원들과 인사 나누고, 서둘러 택시에 올랐다. 형주와 제나는 말괄량이 동네 개 ‘찬차’와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떠나는 게 아쉽다며 멀어져 가는 엘 깔라파테를 자꾸만 뒤돌아 봤다.

남반구의 겨울 아침은 9시가 넘어서야 하늘을 열었다. 세상 그 어디서나 아침이 열리는 광경은 감동스럽지만, 파타고니아의 아침 풍경은 장엄하다. 끝없이 펼쳐진 길, 그 옆으로 이어진 지구의 나이테를 간직한 산들, 광활한 평야, 그 위를 뛰노는 야생동물들의 호기심 어린 몸짓. 아르헨티나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눈 속에 담으려고 우리 모두 열심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99032A3359F668DE315268 택시 앞 창으로 동이 터오는 풍경

에스파뇰을 쓰는 아르헨티나 택시기사와 포르투기스를 쓰는 브라질 중년 부부와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한국인 가족 셋, 칠레 국경으로 가는 택시는 그야말로 다국적 공간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아르헨티나 택시기사와 브라질 중년 부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씀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이 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브라질 중년 아저씨 모세가 영어를 할 수 있어서 우리도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있었다. 모세 아저씨는 자기 부부를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재혼 커플이라고 소개했다. 남편의 아이들 둘에 아내의 아이들 여섯을 합치서 아이들이 여덟이란다. 모세 아저씨는 형주가 자신의 작은 아들과 많이 닮았다며 특히 형주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 돼서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먹었다. 모세 아저씨가 자신은 비건(Vegan)이라 비건 표 샌드위치를 만들었으니 한입 먹어보라고 권하기에 한입 먹어보았더니 담백하고 맛있었다. 브라질의 상파울루에서 카우치 서핑으로 만났던 올디마도 비건이었던 게 떠올랐다. 칠레로 가는 택시 안에서 형주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엄격한 생활방식을 지키는 그들에게서 감동을 받았노라고 내게 말했다. 우리 주변에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하시는 스님도 있긴 하지만, 요리법인 쉽고 구하기 흔한 육식 음식으로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채식을 지켜나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모세 아저씨의 부인은 피가 배어날 만큼 덜 익은 고기를 먹는 육식 지상주의자라고 하는데 자신의 부인이 가진 식습관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그의 모습이 어린 형주에게도 어른다운 멋진 모습으로 보였나 보다.

광산마을을 지나 아르헨티나의 국경마을로 접어드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출국 사무소에 도착해 짐을 내려 출국신고를 하고, 다시 택시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칠레 국경의 입국 사무소 바로 앞에서 택시를 내려 배낭을 짊어지고 칠레 땅으로 걸어 들어갔다. 엘 깔라파떼의 버스 터미널에서 모세 아저씨에게서 말로만 들었을 때는 도보로 국경을 건넌다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했더랬다. ‘혹시 칠레 국경에서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다시 택시 타고 돌아오지 뭐. 어쨌든 뭐라도 해봐야 하니까...’하는 심정이었는데, 와보니 파업 중에도 걸어서 국경 넘는 것은 가능한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9981CC3359F669FF2ED7B3 아르헨티나 국경 사무소 앞
9930853359F66A0231BF79 아르헨티나 국경은 택시로 무사통과
992E343359F66A7C36AECD 칠레 국경 사무소 앞. 여기서는 택시에서 내려 걸어서 통과한 후 칠레 측 택시를 타야 한다.
9914B63359F66A7E068955 탈 아르헨티나 모험을 함께 했던 여행동지, 모세 부부


칠레 입국 사무소에 신고를 마치고 여권에 도장을 찍고, 칠레 국경 사무소 직원들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나서야 모세 부부와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그들과의 인연이 아니었더라면 아르헨티나에서 칠레 국경을 넘지 못해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 티켓도 무용지물이 되었을 테고 이후 여행 일정이 뒤틀릴 뻔했는데... 얼마나 고마운 인연이었던가. 그들은 택시를 타고 바로 뿐따 아레나로 가서 저녁 비행기로 산티아고로 간다고 했다. 그들의 남은 여행에도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뿌에르또 나딸레스로 향했다. 칠레의 풍경은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대륙적 느낌과 달리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모습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도 유럽식 일색이었던 아르헨티나와 달리 정겨운 판잣집들이다.

겨울비가 내리는 길을 30여분 달려서 모세 부부가 추천해주었던 호스텔 란초에 도착했다. 젊은 호스텔 관리인은 예약도 없이 들이닥친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이하며 투숙객이 우리뿐이니 편하게 지내라면서 유창한 영어로 호스텔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바다 풍경이 보이는 2층 방을 쓰기로 했는데, 지내는 내내 비가 오고 하늘이 흐려서 정작 바다 풍경을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다.

방에 짐을 풀다 보니 제나의 휴대용 유모차가 보이지 않았다. 엘 깔라파떼의 숙소에서 아침에 급하게 택시를 타고 나오느라 숙소 로비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내 팔이 유모차를 대신해야 하리라...

짐을 풀고 환전소와 마트, 식당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 원목을 다듬지 않고 나무껍질이 보이도록 집 외벽에 붙인 바닷가 마을의 소박한 살림살이는 우리나라 목포의 옛길에서 느꼈던 정취와 비슷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백인 일색이었던 아르헨티나와 달리, 대개 유럽 이민자들과 인디오의 혼혈인이거나 인디오 원주민이 많았다. 칠레의 지폐는 일반적인 지폐보다 높이가 높고 길이는 짧았다. 재질도 종이보다는 투명한 비닐 재질에 가까워서 형주 말로는 게임머니와 비슷하단다. 환전을 하고 식당에서 칠레 음식을 먹고 나니, 이제야 칠레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칠레에서의 감격스러운 첫 밤이다.


99C6603359F66B250ADC39 칠레에서의 첫 식사. 나무 종지에 담긴 칠레식 살사 소스의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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