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의 힘

칠레, 산띠아고: 산따 루시아 언덕 - 2015/05/29(금)

by 민경화

낯선 도시에서의 첫날은 지도와 나의 위치를 연결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우리 숙소에서 은행이나 마트까지, 지하철역까지, 방문 예정지까지 동선을 파악해야 여행의 일정 짜기가 수월해진다. 오늘은 메뜨로 1호선 산따 루시아역까지 걸어가서 산따 루시아 언덕을 돌아보고 근처 미술관에 들렀다가 한인마트가 있는 메르까도(현지인 시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숙소를 나서는 순간 방향을 잡기 위해 행인의 도움이 절실했다. 유난히 젊은 층이 많아서 그런지 우리 숙소가 대학가에 위치했기 때문인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와 달리 길거리에서 만나는 현지인들과 영어 대화가 가능했다. 메뜨로까지는 도보로 15분, 산따 루시아 언덕은 거기서 대로 건너편에 있었고 센뜨로의 메인 광장도 도보로 30분 이내 거리이다. 이만하면 교통편도 그리 나쁘지 않다.

산따 루시아는 도심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바위 언덕이다. 산띠아고를 만든 발디비아가 도시를 원주민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만든 요새라고 한다. 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있고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성곽을 지나 전망대로 올라서면 산띠아고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 바로 아래로는 작은 분수대가 있었는데, 거기에 앉아서 가판대에서 파는 산띠아고의 명물 길거리 음료 ‘모떼 꼰 우에시요’(Mote con Huesillo)를 한잔 사다가 셋이 나눠 먹었다. 플라스틱 컵에 삶은 옥수수와 껍질 벗긴 밀을 넣고 그 위에 시원한 복숭아 주스를 부어 마시는 이 음료는 달고 시원할 뿐 아니라 미끌미끌하고 통통하게 불어 터진 옥수수와 밀 건더기를 건져 먹는 재미가 일품이었다.


9991BB3359F838FE16B4D6 산따 루시아 언덕 초입
99439F3359F8390105DC99 언덕이 생긴 모양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세운 건물들
99E1EC3359F839030E5DF8 이쪽 측면의 바위 언덕은 제주도의 주상절리를 연상시킨다.
9955C83359F839061C9703 센뜨로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
99BBCF3359F839092D35CA 발디비아의 동상
99817A3359F8390B18E3F0 공원 가판대에서 파는 모떼 꼰 우에시요
99CB223359F8390E4863C0 타일로 만든 예쁜 벤치
9996903359F83911258822 아르헨티나의 바릴로체 시비꼬에서 봤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장승
99FBC43359F83914195D29 언덕 위, 요새의 입구


공원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10여분 걸어서 비주얼 아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현대적 감각의 회화작품들과 설치미술작품들이 전시된 작은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미술관 건물 밖에 양옆으로 골동품과 미술품, 중고 책을 파는 가판대가 늘어서 있다. 미술관도 그렇고 거리의 가판대도 그렇고 이 도시 곳곳이 가진 이미지는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아기자기하다. 아이들은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보다 거리 가판대의 물건들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지도 않을 골동품들과 미술품들을 이것저것 구경하며 그 거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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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6723359F83BC118504E 비주얼 아트 박물관의 작품들. 규모가 작아서 돌아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991BE03359F83BC439D5ED 미술관 밖 거리의 미술관. 우리는 이런 미술관을 참 사랑한다.


99B7253359F83BC727A69D 미술관 앞 악세사리 가판대


비주얼 아트 박물관에서 나와 현대미술관을 지나 마뽀쵸 강(Rio Mapocho)을 따라 한 시간여를 걸어 한인마트가 있다는 시장으로 향했다. 부실한 저녁과 아침식사에 이어 오후 세시를 넘긴 시각까지 점심식사도 하지 못했으니 아이들은 허기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주린 배를 움켜쥔 채 한인마트와 식당이 있는 골목을 찾아 나섰으나 아무리 물어봐도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는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바쁜 일상에 파묻혀 우리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작은 키의 동양인 할머니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무작정 우리를 향해 돌진해왔다. 겹겹의 인파를 뚫고 온 그녀는 일본 이민자였는데 한눈에 우리가 한국인인 걸 알아보시고 달려와 길을 알려주셨다. Gracias a la vida!

‘숙이네 식당’이라고 쓰인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벌써 김치 냄새와 삼겹살 굽는 냄새, 된장 냄새, 그리고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를 쓰시는 사장님이 동시다발적으로 우리 트리오를 반겨주었다. 집에서였다면 별 감흥 없이 먹었을 김치와 멸치볶음이 혀에 감겼다. 사장님 인심이 어찌나 좋은지 염치 불고하고 반찬을 몇 번이나 더 달라고 해도 많이 먹으라며 웃는 낯으로 빈 접시를 채워주셨다. 한식이 칠레인들의 입맛도 사로잡은 모양인지 이 식당에는 한국인 손님보다 현지인 손님이 더 많았다. 누룽지 맛 사탕을 입에 넣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숙소로 향했다.

음식이 가진 힘이란 생각보다 컸다. 제대로 된 밥을 먹고 나니 배 밑바닥부터 가슴까지 배터리가 완전히 충전된 느낌이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안고 잠자리를 뒹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배가 부르다.


99F8AD3359F83D590D732B 재래시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게임방인지 화려한 게임 캐릭터를 그린 벽화가 눈에 띈다.
9921063359F83D5C096693 하루 종일 시내를 헤메고 돌아다닌 덕분에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눈네 익었다.
9934F23359F83D5E38C89E 산띠아고에서의 두번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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