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산띠아고: 아르마스 광장 주말 풍경, 국립 미술관-15/05/31
칠레는 험난한 정치적 수난의 역사를 가진 나라 중 하나이다. 1970년 세계 최초로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급진적 사회주의를 펼치며 지하자원을 국유화하고 분유를 무상 지급하겠다는 등의 공약을 앞세우자 이에 위기를 느낀 미국과 다국적 기업 네슬레 등의 경제 제재로 사회적인 혼란이 일었다. 이때 미국을 등에 업은 삐노체뜨(Augusto Jose Pinochet Ugarte)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피의 독재를 시작했다. 오랜 민주화 운동 끝에 1989년 국민 재신임 투표에서 패배해 정권에서 내려오지만 유럽에서 호화로운 망명생활을 이어가던 그를 뒤늦게나마 법정에 세울 수 있었으나 2006년 12월 재판 중 노환으로 사망함에 따라 그의 포악한 독재정치에 대한 단죄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 삐노체뜨는 우리 시대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독재자 중의 한 사람이다. 전 국가적 지지를 받았던 아옌데 대통령을 살해하고 강대국을 등에 업고 자신의 조국을 피로 물들인 파렴치한. 비슷한 민주화의 역사를 가진 나라 국민으로서 그가 법적 심판을 피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과거의 독재자에게 정당한 법의 심판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있었기에, 그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아옌데 대통령의 흔적을 좇아 그가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역사적 장소인 모네다 궁전을 꼭 방문해 보고 싶었으나, 주말 방문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대기 줄이 그 넓은 헌법광장을 빙 둘러 한 바퀴 넘게 이어져 있었다. 그 줄을 기다려 입장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겠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모네다 궁전 옆으로 이어진 아르마스 광장에는 토요일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구식 군대 의상을 입고 사진 찍으며 돈을 버는 청년들, 동상처럼 온몸을 구리 빛으로 칠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구경꾼과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윙크를 하거나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미는 거리 예술가들, 손으로 돌리는 풍금에 말하는 앵무새를 달고 장난감을 파는 부부, 어제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강렬한 북춤 가족,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구경꾼들에 둘러 싸여 재치 있는 입담으로 사람들을 울고 웃기는 만담꾼들...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가득했다.
일요일에는 국립 박물관이 모두 무료입장이므로 이를 최대한 활용해야만 한다. 우리는 아르마스 광장 바로 옆에 위치한 국립 역사박물관과, 거기서 약 10분 거리의 현대 미술관을 방문했다. 소박한 규모의 국립 역사박물관에는 칠레 원주민들의 유물들 위주로 전시되어 있었고, 그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의 현대 미술관은 건물 자체의 웅장함과 거기에 전시된 조각품들의 수준도 대단히 높았다. 현대 미술관에는 19세기 조각품 특별전과 현대 설치 예술품들이 1층에 전시되어 있었고,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귀족들을 그린 작품들과 현대 작가들의 미술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었다. 농업 국가의 이미지 뒤에 숨겨진 높은 예술 수준에 내심 감탄하며 미술관 곳곳을 둘러보았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현대 미술관 바로 앞에 왕복 6차선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삐에로 분장을 한 두 남자가 지나가는 차를 대상으로 즉석 마임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일부 몇 대의 차량은 길을 막고 장난을 거는 두 사람에게 사납게 경적을 울려대며 난폭하게 지나쳐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차량 운전자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삐에로가 걸어오는 장난에 넉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작은 차는 작다고 놀려대고, 큰 차는 크다고 차위에 드러누워 구르고, 트럭이 오면 멈춰 세우고는 자기가 멀찍이 서서 힘겹게 끌어오는 시늉을 하고 그러면 트럭은 천천히 끌려가는 시늉을 했다. 가족이 꽉 들어찬 차에서는 한 아이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타고 가고 내린 아이가 차를 잡아타려고 뛰어다니게 만들고, 제품 운반 중인 승합차에서는 보따리에서 여성 속옷을 꺼내 들고 흔들어 대며 ‘나 잡아봐라’를 하며 도망가기도 하며 거의 한 시간가량 공연했다. 두 삐에로의 익살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공연 내내 웃느라 볼 근육이 아플 지경이었다.
우리의 서울에서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바쁜 시간에 차로를 막고 교통 흐름을 방해했다고 경찰이 출두해서 상황을 재빠르게 정리하진 않았을까? 시민들의 마음의 여유가 만들어낸 이 멋진 공연에 대한 보답으로 공연이 끝난 후 돌아오는 모자에 아낌없이 관람료를 넣었다. 이후 여행길에 만났던 여행자들이 산띠아고에 갈 예정이라고 하면, 일요일 현대 미술관 앞의 삐에로 공연을 꼭 놓치지 말라고 얘기해 줬다. 시민들과 즉석으로 만들어내는 그들의 공연이 앞으로도 안전하게, 오랫동안 쭉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