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마리아

칠레, 산띠아고: 볼리비아 비자 신청, 산끄리스또발 언덕-15/06/01

by 민경화

우리의 다음 여행 국인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비자를 받는 나라이다. 다음 여행지인 아따까마에서 볼리비아로 국경을 넘어갈 예정이므로 산띠아고에서 미리 비자를 받아두어야 한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정인 볼리비아 비자 신청을 위해 필요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아침 일찍 볼리비아 대사관 근처의 역에 내렸으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볼리비아 대사관의 위치를 몰랐다. 오전 10시경에 서류를 제출해야 그날 오후에 비자를 받을 수 있으므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마음이 급했다. 길을 헤매느라 벌써 지쳐버린 제나를 등에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해하고 있는데 휠체어에 탄 아저씨 한분이 위치를 안다며 몸소 안내해주셨다. Gracias a la vida!

볼리비아 대사관에 도착해 서류를 작성한 후 순서가 되어 심사실에 들어서니 온화한 외모의 심사관이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심사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을 보고는 아빠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서랍에서 초콜릿을 한 줌 꺼내 아이들에게 주고는 볼리비아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 덧붙여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면 좋은 곳들을 추천해주기까지 했다. 그분 덕분에 우리가 가진 여행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는 은광의 도시 ‘뽀또시’에 갈 수도 있었고, 고산병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친절이 너무 고마워서 악수라도 하고 나오고 싶었으나 배낭여행 1개월 반 동안 한 번도 세탁하지 못해 더러워진 점퍼의 소맷자락이 부끄러워 차마 손을 내밀지 못했다.

대사관에 비자 신청 서류를 접수해두고 좀 느긋해진 마음으로 근처 쇼핑몰에서 필요한 물건도 사고 와이너리에서 받은 기념품 와인 잔을 포장해 우체국에서 한국으로 보내면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오후 네시, 약속한 시간에 맞춰 볼리비아 대사관에 들러 비자를 받았다. 이로써 일주일 후 여행하게 될 볼리비아 입국 준비가 완료되었다.


993BE23359F8763819A9F6 장기 배낭여행자에게 이렇게 밝은 색 외투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던 것이다.
9961283359F8763A15DB14 볼리비아 대사관과 대형 쇼핑몰 사이의 마뽀쵸 강. 지도에 강(Rio)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가뭄으로 물이 거의 말라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칠레의 저항시인 빠블로 네루다의 집이었으나 월요일은 휴관이라서 굳게 닫혀 있었다. 그다음 행선지로 정한 산 끄리스또발 언덕이 근처에 위치해 있어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기도 월요일이라 케이블카는 운행을 하지 않았고 공원 내 대부분의 시설들이 휴관이었다. 그나마 월요일 방문객을 위한 셔틀버스만을 운행하고 있어서 선택의 여지없이 셔틀버스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

날씨가 흐린 덕분에 안갯속에 잠긴 흐릿한 도시 풍경이 언덕 아래로 펼쳐졌다. 도심의 전경은 햇빛 쨍쨍 밝은 날 보다 흐린 날 더 아름답다. 하긴, 어디 도심의 전경만 그런가. 뭐든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이는 것보다 반쯤 가려진 대상물이 더 호기심을 자극하고 우아하게 보이기 마련이니까.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20분 정도 올라가니 언덕 정상에 하얀 성모상이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느낌에 물결치듯 흘러내린 옷자락이 성모가 되기 이전 소녀 시절의 마리아인 것만 같다. 소녀처럼 가녀리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하늘을 우러러 사랑과 평화를 구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남미의 도시들은 그 도시의 상징적인 곳이나 주로 높은 언덕에 가톨릭의 상징물들을 세워두는 경향이 있다. 브라질 리우의 예수상이 그렇고, 이곳 칠레 산띠아고의 하얀 성모상, 페루 꾸스꼬의 예수상, 에콰도르 끼또의 검은색에 가까운 천사상이 그것이다. (아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다른 상징물도 더 많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종교를 가진 각각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민감정과 예술 감각을 반영해 만들어낸 각기 다른 종교적 상징물들을 보는 것은 라틴 아메리카 여행의 또 다른 재미였다. 마치 불교 영향권에 있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인 중국, 티베트, 태국, 미얀마, 한국, 일본이 각기 다른 불상과 탱화, 사찰을 만들어낸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9989DA3359F8763D2C818D 빠블로 네루다의 산띠아고 집 앞
99A53A3359F876402932CE 산 끄리스또발 언덕의 마리아 상
997D053359F8764313E8A6 안개 속 산띠아고 시내 전경. 도시를 뒤덮은 것이 스모그가 아니었길.


계획했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산따 루시아역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과 그 길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들이 이제 눈에 익숙하다. 바윗덩어리들이 이리저리 모여 사람의 얼굴 형상이 된 바위산, 담배를 입에 문 노회한 정치인을 풍자하는 그림, 가톨릭의 나라에 그려진 석가모니 상, 팔다리가 빙글빙글 꼬인 장난꾸러기 남자아이 등, 우리가 방향을 바꿔야 하는 골목마다 길을 찾기 위해 기억했던 그림들을 이렇게 제대로 들여다보니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삶과 함께 하는 작품들, 그 하나하나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궁금해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9997B63359F8F89B0B2507 산따 루시아 역으로 가는 길의 벽화
9997843359F8F89D13E36E 숙소에서 은행 가는 길의 벽화
996FA73359F8F8A00C94B5 숙소로 들어가는 골목길, 주택가에 그려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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