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뽀또시: 조폐국 박물관 - 2015/06/10(수)
칠레 아따까마에서 만났던 프랑스 청년이 추천해줬던 이 숙소는 아주 훌륭했다. 점잖은 중년 부부내외가 운영하는 호스텔은 입소문을 타고 2호점을 낼 만큼 성공했으며, 광산 투어를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도 운영했다. 사실 뽀또시가 은광의 도시인만큼 여행자들이 꼭 해봐야 할 투어 중 하나는 광산 투어였다. 매일 아침 식사 테이블에서 나누는 여행자들의 이야기도 광산 투어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광산 투어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네 살 여자아이도 갈만한지 물어봤더니 통로가 좁고 먼지도 많아서 힘들 거라는 반응이다. 아쉽지만 광산 투어를 포기하기로 결론내고 나니 이 도시에서 갈만한 곳이라고는 조폐국(Casa de Moneda) 박물관뿐이었다.
조폐국 건물 출입구에 걸린, 포도송이가 달린 월계관을 쓴 단발머리의 남자 얼굴은 조폐국의 조각 수장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로마 신화에서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으로 나오는 바쿠스(Bacchus)의 형상이라는 설도 있다. 그가 누구였 건 그를 조각한 프랑스 예술가는 그가 조각할 작품의 대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부리부리한 눈에 한쪽 입 꼬리가 다른 쪽 보다 올라가서 다소 야비한 표정을 띤 괴기스러운 얼굴로 표현했으니 말이다.
식민지 시대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5개의 정원과 200여 개의 방이 있는 이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은 1572년 이 곳에서 채굴된 금과 은으로 화폐를 만들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화폐는 모두 유럽으로 보내졌고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에서 유통되었던 화폐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학구적인 분위기의 영어 가이드를 따라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건물 2층에 위치한 그림이 있는 방들이었다.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식민지 시대 초기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천주교의 성모 마리아가 당시의 원주민 토속 신앙이었던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와 접목되어 융합되는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주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각국의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사진으로 찍었었는데, 그중 유일한 인디오는 조폐국 2층에 걸려있는 종교화를 그린 유명한 화가였다. (숙소 주인에게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봤었는데 메모해뒀던 종이를 잃어버려 그의 이름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림 전시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식민지 당시 이 도시에서 주조되어 유럽으로 공급되었던 은화들이 전시된 방이었다. 전시대 옆에는 은화를 주조하는 데 사용되었던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에서 말과 사람이 2층으로 연결된 톱니 달린 축을 돌리면 2층에서 녹인 금과 은을 틀에 붓고 망치질을 해서 금화와 은화를 만드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2층 전시실의 바닥은 당시의 마룻바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망치질을 하던 사람의 발 모양이 움푹하게 패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발자국이 패인 자리에 발을 딛고 서 보니 침략자에게 마소처럼 부림을 당했을 식민지 노동자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건물들 사이에는 높은 돔 형태의 지붕을 가진 독특한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에는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옆으로 난 창이 없었고 높은 천정 부분에 작은 채광창만이 하나 나 있었다. 이곳에서는 은을 정제하는 작업을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의 몸에 치명적인 화학약품을 썼다고 한다. 그 화학약품으로 인해 작업자들의 손톱이 빠지고, 이가 빠지고, 눈이 멀고, 목숨을 잃기까지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하니, 수많은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기를 반복했던 당시 유럽 침략자들의 인디오에 대한 착취가 가히 어떤 수준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 작업을 하는 작업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옆으로 창문을 내지 않고 천정 위에 채광창만을 낸 그런 기이한 모양의 건물을 지었다고 나니, 이곳은 살아서는 나올 수 없는 죽음의 작업장이었던 것이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곳에는 은으로 만들었던 온갖 종류의 은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앞서 인디오들이 어떻게 착취되었는지 봐왔던 터라 전시품 하나하나에 묻어있을 인디오의 피와 눈물이 떠올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폐국 투어를 마치며 나는 가이드에게, 이방인인 내게도 이렇게 가슴 아픈 조국의 아픈 역사를 이방인에게 전달하는 직업이 힘들지 않은지 물었다. 그녀는 예의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랑스럽든 치욕스럽든 조상이 겪었던 과거의 일을 지금의 우리가 바꿀 수는 없어요. 피해자였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과거의 가해자들에게 상기시켜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아픔을 겪었던 조상들의 희생이 헛되이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아픈 역사의 전달자로써 나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과연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던 조폐국 투어 하나만으로도 뽀또시를 방문했던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고 할 만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조폐국 바로 옆에 위치한 중앙시장은 우리네 도깨비 시장 같은 분위기의 작은 시장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시장에서 점심을 해결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 가지 메뉴를 먹고 있는 곳이 있었다. 갓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엄마는 시장통의 작은 가게에서 닭국을 팔며 코흘리개 아들을 살뜰하게 챙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우리도 그 가게에 잡고 앉아 사람들이 먹는 것을 달라고 했다. 작은 법랑 대접에 담겨 나온 것은 따듯한 닭 육수에 삶은 감자와 초록색 풀을 고명으로 얹은 부드러운 수프였다. 아이들 입맛에 맞을까 싶어 두 그릇만 시켰다가 맛있어서 뚝딱 먹어치우고는 두 그릇을 추가로 더 주문해 먹었다.
시장에 앉아 둘러보니 남산타워처럼 도시 전경을 볼 수 있는 타워가 보였다. 산 전체가 온통 붉은 집으로 뒤덮인 도시 전체와 은광 갱도 입구를 보고 싶은 마음에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 사람이 앉아있기에 합승인가 했더니 택시 앞좌석에는 택시기사의 부인과 서너 살쯤 되는 그들 부부의 딸이 앉아 있었다. 토끼처럼 귀여운 딸과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다니는 택시기사는 하루 종일 일을 해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겠다. 택시는 좁은 골목길을 곡예하듯 빠져나오고 언덕길 아래로 내 달려 타워 앞에 도착했으나 타워의 출입구는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헛걸음에 아쉽긴 했지만 덕분에 도시의 다른 구역으로 이동했으니 여기저기 기웃거릴 시간을 얻었다. 길가에서 소녀가 파는 수숫대를 사서 아이들과 함께 씹어 먹으며 그 부드럽고 단물을 쪽쪽 빨아먹기도 하고, 할머니가 파는 즉석 과일주스를 사서 마시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보이는 주전부리를 이것저것 사 먹고,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들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골목을 쏘다녔다. 이렇게 예쁜 골목길들이 길을 잃었을 당시에는 무섭게만 보였으니 마음의 눈은 물리적인 눈 보다 더 강력한 필터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숙소에서 조금 이른 저녁을 만들어 먹은 후, 아이들은 숙소의 고양이와 놀고 나는 빨래를 마친 후 이후의 여행 일정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은 프랑스 청년들에게 오늘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혹시 뽀또시에 아이들과 갈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산 정상에 있는 온천이 있다고 들었다며 그곳에 대한 정보를 자기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내게 알려줬다. 다행이다. 그들 덕분에 내일 할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