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우유니에서 뽀또시로 이동 - 2015/06/09(화)
어제 소금사막 투어에서 밤늦게 추위와 씨름하다 돌아와서 피곤했지만, 아침 일찍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인 후 배낭을 둘러메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머리를 길게 따 늘어뜨린 30대의 인디오 여인이 기운찬 제스처와 목소리로 뽀또시를 거쳐 수끄레로 가는 버스의 손님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제나와 내가 함께 앉고, 우리와 따로 앉은 형주 옆자리에는 형주 또래의 인디오 소녀가 앉아서 호기심과 수줍음이 섞인 표정으로 우리 셋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형주에게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라고 했더니, 형주도 그 소녀 못지않게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제나가 나서서 그 언니한테 사탕도 주고 간식도 나눠주며 살갑게 굴어봤으나, 그 소녀는 앞자리에 부모와 함께 앉은 어린 남동생에게 우리가 준 먹을거리를 나눠줄 뿐 우리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우유니에서 뽀또시로 가는 길은 포장도로로 연결되어 큰 불편이 없었다. 버스는 중간중간 승객들을 태우고 내려주기 위해 정류장에 멈춰 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바구니에 간식거리를 가득 담고 버스에 올라타 승객들에게 간식을 파는 생활력이 강한 인디오 여인들이 몰려왔다 빠져나가곤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같이 비옥하고 거대한 대륙을 가진 나라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우선 평지가 그리 넓지 않고 산악지대가 많았고, 그나마도 선인장과 마른풀들만 듬성듬성한 메마른 땅이 대부분이었다. 돌이 많은지 산비탈에 돌을 쌓아 올려서 경계를 그어놓고 농작물을 가꾸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과거 우리네 화전민의 고단한 삶이 겹쳐지면서 마음 한편이 애잔해졌다.
볼리비아는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칠레에 태평양에 면한 아따까마 사막을 빼앗겨 내륙국이 되었다.(태평양 전쟁은, 칠레 산띠아고 근교의 발빠라이소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 말 볼리비아 연합군과 칠레 사이에 벌어졌던 4년 전쟁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브라질과의 전쟁에서 고무 산지인 아마존 유역을 빼앗기고, 파라과이와의 전쟁에서 유전지역을 빼앗기면서 국토의 절반을 잃었다. 그렇게 현재의 거친 산악지대만이 남은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많은 도시들이 해발 4천 미터의 고산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우유니도 해발 4천 미터의 고지대였기에 다소 숨쉬기가 힘들었고 몸이 무겁게 느껴졌었는데, 우리의 다음 행선지인 뽀또시는 그 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고산병이 걱정되어 방문할지를 두고 고민하기도 했었지만, 칠레 산티아고에서 볼리비아 비자 신청할 때 대사관에서 만났던 심사관의 강력한 추천으로 유럽 정복자들에게 철저히 착취당했던 아픈 역사를 가진 이 도시를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4시가 되어 붉은 흙으로 지어진 은광의 도시 뽀또시에 도착했다.
산 아래에 위치한 버스 터미널에서 20분 거리인 호스텔까지 걸어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길에서, 내 몸무게에 배낭의 무게까지 더 해진 데다가 고산지대에 익숙하지 않은 폐활량 때문에 몇 발짝 걷다가 주저앉기를 열두 번도 더 했나 보다. 뭔가 먹으면 힘이 날거란 생각에 무작정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요기부터 하기로 하고 들어선 집은 닭고기 식당이었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그 식당에는 제나 또래의 아이들 네 명이 있었는데, 우리가 식사를 하는 내내 옆에 붙어서 아이들 특유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관찰했다. 물이 어찌나 귀한지 식사 후 화장실을 가려니 식당 주인의 큰딸이 우리를 이끌고 식당 뒤편으로 한참을 돌아들어가 자물쇠로 잠겨진 화장실 문을 열어주고는 우리가 볼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큰 통에 받아둔 빗물을 양동이에 퍼담아와 변기에 들이부어 물을 내려줬다. 뽀또시에서 지내는 내내 숙소를 나서면 화장실을 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분명 자기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있을 텐데 식당에서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해도 화장실이 없다고만 했다. 유료화장실도 없으니 쉬를 자주 하는 어린 제나는 그럴 때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어 도둑고양이처럼 볼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16세기 은광 개발을 위해 산등성이에 촘촘히 지어진 집들 사이로 난 골목길은 작은 택시 한 대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비좁았다. 걸어가다가 차라도 나타나면 차가 지나갈 때까지 벽에 바짝 붙어 있어야 했는데, 숙소가 있는 동네의 그 좁은 골목길은 모든 길이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물어물어 숙소를 찾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간신히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면서 형주에게 은행 심부름을 시켰는데,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형주가 걱정돼서 녀석을 찾으러 숙소를 나섰다가 그 미로 같은 골목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호스텔의 이름을 말해도 모두 고개를 내저었고,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길에서 기억을 되짚어 길을 찾으려 해도 계속 같은 곳만 돌고 있었다. 걷다가 지친 제나를 등에 업고 한참을 걸어 사람들로 붐비는 큰길로 나와서 여행사를 찾아들어가 길을 물었다. 그 여행사 직원은 숙소의 위치를 알지 못했으나 다행히 뽀또시 시내를 그린 작은 지도를 가지고 있어서 지도상에 숙소로 예상되는 위치를 확인한 후 더듬더듬 좁은 길을 돌고 돌아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은행에서 우리보다 먼저 숙소로 돌아온 형주는 없어진 우리를 걱정하며 숙소 앞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초조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 돼서야 좁은 골목길 끝에서 우리를 발견하고는 뛰어와서 온 골목을 헤매고 다니느라 지친 우리를 맞이했다.
“엄마, 많이 걱정했어. 이제부터 어디 갈 때 나랑 꼭 같이 가.”
“그래, 아들아. 너 없으면 안 되겠어.”
볼리비아 뽀또시에서 마흔넷의 엄마는 길을 잃었고, 열여섯의 아들은 엄마를 걱정하는 듬직한 보호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