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부주의가 불러올 참사

볼리비아, 뽀또시: 오호 델 잉까 - 2015/06/11(목)

by 민경화

어젯밤 만났던 친구가 알려준 산 위의 노천 온천의 이름은 오호 델 잉까(Ojo del Inca)였다. 그곳으로 가려면 미니버스로 이동해야 하는데, 아랫동네의 시장 바로 앞에 근교 마을로 가는 미니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언덕길을 걸어내려 가면서 사탕 수숫대를 한 봉지 사서 씹어먹으며 터미널로 향했다.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우리 트리오는 그곳에서도 모든 이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 버스 차장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서 어디로 가냐고 물었고, 우리가 오호 델 잉까로 간다고 하니까 친히 그곳으로 가는 버스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기다리라고 했다. 열 명 정도가 정원인 미니버스는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버스 좌석이 차면 출발하는 방식이었는데, 우리는 맨 뒤에 나란히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우리 앞좌석에는 대낮부터 술이 얼근하게 취한 아저씨 두 분이 앉아서 뭐라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뽀또시와 오호 델 잉까가 멋진 곳이라는 말인 듯해서 계속 웃는 얼굴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옆에는 여덟 살 남짓한 남자애가 엄마 무릎에 앉아 있었다. 아이 엄마는 아들에게 찾아온 영어 사용의 기회를 활용하고 싶어서 계속 말을 걸어보라고 채근했지만 아들은 부끄러워서 우리와 눈도 맞추지 못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인사를 건네 봤으나 계속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수줍게 웃기만 했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달리던 버스가 어느 다리 앞에 멈춰 서더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뭐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러자 버스 안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뒷자리에 앉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오호 델 잉까’라고 알려주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자 운전기사 아저씨도 버스에서 함께 따라내려서는, 길을 건너 산으로 계속 올라가면 된다고 손짓으로 알려주시고는 다시 버스에 올라타셨다. 그의 친절이 고마워서 길을 건너서서 출발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더니 버스 승객들도 모두 손을 흔들며 인사 해줬다. 따듯한 시골 인심에 마음이 훈훈하다.


99497B3359FA793E29B2A3 버스 타러 가는 길. 길에서 파는 사탕수숫대를 씹으며 가는 남매
99FF893359FA794020897B 근교로 다시는 미니 버스들의 종점인 버스 터미널
9956F13359FA794226B036 버스 종점 앞 시장
99F4113359FA79442E2B0B 버스 안 풍경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알려준 길로 계속 걸어서 30분 정도 산을 올랐을까. 그저 거친 풀이 자란 산과 바람결에 부스러지는 거친 바위로 둘러싸인 길만 계속 나왔다. 이길 어디에도 온천이 있을 법하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게 분명하다고 형주와 티격태격하기를 서너 번 했을 무렵 정말 뜬금없이 산 정상에 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집 바로 앞에 둥그런 모양의 자연이 만든 온천이 있었다. 작은 호수에서는 사람들 서넛이 유유히 수영을 즐기고 있었고 오리 한 쌍이 둥둥 떠다니며 그들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수영을 제법 잘하는 형주는 당장 웃옷을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 들어갔고,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제나와 나는 온천 옆에 작게 만들어진 얕은 탕에서 튜브를 끼고 둥실둥실 떠 다녔다. 거친 산으로 둘러싸인 산 정상에서의 온천욕은 그야말로 신선놀음이었다. 하늘은 맑고 높았고, 산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바람은 선선했으며, 물은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오호 델 잉까(Ojo del Inca)라는 이름은 '잉까의 눈'이라는 뜻인데,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가 호수를 바라보니 정말 이름 그대로 잉까의 거친 대지에 박혀 있는 초롱초롱한 눈동자처럼 보였다. 누가 이 호수의 이름을 지었는지 참 시적인 마음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준비해온 간식을 먹으며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다 보니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둘러 몸을 말리고 가방을 챙겨 들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991B9E3359FA7D022E7FAF 험준한 산에 둘러 싸인 자연 속의 노천탕
9920BB3359FA7D0603A6D7 이순간, 네 영혼은 하늘에 머물었을까? 산에 머물었을까? 아니면 호수에 머물었을까?
9944883359FA7D08012B0A 오리와 함께 노니는 형주
991FA13359FA7D092E6C08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오호 델 잉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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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 버스에서 내렸던 곳의 반대편에 서서 지나가는 버스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어봤으나 좌석이 꽉 찬 버스들은 우리를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렇게 두 대가 지나가고 나서 세 번째 버스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버스기사는 버스가 꽉 찼음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좀 더 밀착시켜 앉게 해서 자리를 만들어 낸 후 우리가 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형주는 뒤편에 앉고 나는 제나를 무릎에 앉힌 채 운전석 바로 뒤에 버스가 달리는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난 간이 좌석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뒤를 보고 앉은 나와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한대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졸려서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졸고 있는 제나를 보기도 했다. 내 맞은편 바로 앞에는 까맣고 작은 인디오 여인의 중절모를 쓰고 회색빛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내린 전형적인 인디오 여인의 복장을 하신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하늘색 바탕에 작고 앙증맞은 꽃무늬가 수 놓인 할머니의 긴 주름치마가 어찌나 곱던지, 어린 시절 고운 얼굴의 내 할머니가 즐겨 입으시던 주름치마가 생각나 괜히 혼자 코끝이 찡해졌다.

물놀이를 하고 온 길이라 춥고 배가 고팠던 우리는 버스터미널 앞의 시장에 들러 쇠고기와 야채를 사다가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닭고기 식당뿐인 이곳에서 오랜만에 아이들에게 쇠고기를 먹이고 싶은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으나, 나는 그때 좀 더 신중했어야 했었다. 이곳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냉장고에 들어있지 않고 가판대 위 쇠꼬챙이에 걸려 있어서 파리가 윙윙 날아다니곤 했는데, 여기 주민들도 다 그렇게 먹으니 별일 없으려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큰 실수였다. 칠레 국경 파업 이후, 우리 여행의 두 번째 위기가 그렇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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