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태양의 섬 - 2015/06/024(수)
태양의 섬은 잉까 제국의 창조 신화가 태동한 곳이다. 잉까의 시조인 망꼬 까빡(Manco Capac)이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마마 오끄요(Mama Ocllo)와 함께 띠띠까까 호수에 나타나 태양의 섬에 강림했다는 전설이 깃든 그곳으로 간다.
스무 명 정도가 정원인 작은 쾌속선에 1층에는 현지인들이 2층에는 여행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도가 높아서 인지 호수에 반사된 태양 빛이 강렬해서 머리와 얼굴은 따가운데 빛이 닿지 않는 아래쪽은 얼어붙을 듯이 춥다.
드넓은 호수 위를 한 시간 달려 태양의 섬에 도착했다.
이 섬은 선착장에서부터 바로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하필 섬의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동네 주민들에게 숙소의 위치를 물으면 바로 저 위라고 손짓을 했지만 그 ‘바로 저 위’는 꼬불꼬불 가파른 고갯길을 숨을 몰아 쉬며 40분을 오른 후에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올라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숙소로 가는 길에 만난 이 섬의 정경은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고단함을 씻어내줄 만큼 예뻤다. 당나귀 똥이 말라 가루가 되어 폭신한 느낌마저 주는 가파른 길 양옆으로 낮은 돌담이 둘러진 아담한 집들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돌담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아담한 마당에는 소담한 꽃밭이 있었고,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당나귀 우리가 있었고, 검게 그을린 부엌이 있었고, 빨랫줄에는 색색깔의 고운 옷들이 걸려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었다. 작은 중절모를 쓰고 자신의 몸 보다 큰 봇짐을 지고 그 가파른 길을 오르고 계신 할아버지, 짙은 인디오 전통 의상을 입고 양 떼와 당나귀 무리를 몰고 방울을 울리며 좁은 돌담길을 지나가는 양치기 할머니, 어린 동생을 돌보며 구멍가게를 지키는 사내아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모여 마을 공사를 하며 틈틈이 음식을 함께 나누는 어른들. 이 모든 풍경은 우리가 마치 살아있는 동화책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힘들긴 했지만 섬의 능선에 위치한 숙소에서는 양옆으로 호수의 풍경과 섬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꼬빠까바나에 큰 짐을 두고 하룻밤 지낼 짐만 가지고 왔던 터라 작은 가방을 숙소의 방에 던져두고 물병만 챙겨서 능선을 따라 섬의 정상까지 올라갔다. 드문드문 피어난 작은 야생화들, 나뭇가지를 사람의 몸 모양으로 엮어서 군데군데 걸어둔 커다란 허수아비,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어미와 새끼 야마, 가파른 산마루에 옹기종기 모인 그림 같은 집들, 바다처럼 깊고 드넓은 호수, 그리고 그 신성한 호수 위로 부는 바람. 그 속의 우리 셋은 빛과 바람의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던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에 앉아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며 태양신 유적지가 있다는 곳으로 트레킹을 다녀올까 생각해 봤지만 선착장에서 능선까지 올라오는데 에너지를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오늘 더 이상의 트레킹은 아이들에게 무리겠다 싶어서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인터넷이라는 얄궂은 문명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잠깐 동안 조용히 선착장 반대편의 호수 쪽으로 나 있는 발코니에 앉아 섬과 호수를 감상하는가 싶더니 제나는 어디서 주워온 작고 하얀 비누조각으로 발코니 바닥과 난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 어렸을 적 시골마을에서 하얀 곱돌을 주워다 땅이나 포장된 도로 위에 그림 그리고 글씨도 쓰며 놀았던 추억이 제나의 모습에 겹쳐졌다. 형주는 꼬빠까바나의 노점 아주머니에게서 사온 고무공을 빈 페트병으로 치며 혼자서 놀더니, 이내 빈 페트병을 하나 더 주워다 엄마랑 테니스를 하자고 했다. 제나는 심판을 보며 신이 나서 밖으로 튀어나간 공을 주워주었고, 생각보다 잘 맞아주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고무공에 서로 얻어맞아가며 두 선수와 심판 모두 배를 잡고 웃으며 뒹굴었다. 인터넷 없는 시간을 선물해준 태양의 섬에게 무챠스 그라시아스!
한바탕 땀을 빼고 나서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식당에서 건너편 섬으로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녁식사를 했다. 빨간 석양이 좋아서였는지 저물어가는 하루가 섭섭해서였는지 집집마다 들어앉은 당나귀들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길게 울어댔다.
볼리비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