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태양의 섬에서 페루 꾸스꼬로 이동 - 2015/06/25(목)
태양의 섬에서의 일출을 보기 위해 아이들이 자고 있는 새벽에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숙소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스름한 새벽, 당나귀를 앞세우고 농사일을 나가는 농부들과 목초지에 양 떼를 풀어놓으려고 길을 나선 양치기 할아버지들이 방울을 울리며 골목을 지나갔다.
해가 떠오르려고 동쪽 하늘이 차츰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순간 아래층에서 엄마를 부르는 제나의 목소리가 울음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얼른 뛰어 내려가 제나를 담요에 싸안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왔다. 태양의 섬에서 바라다 보이는 동쪽 끝 하늘이 투명한 주홍빛을 섬의 서쪽면에 서서히 넓게 펼쳐내는 그 황홀한 순간을 나 혼자가 아니라 내 어린 딸과 함께 볼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축복 같은 시간이다.
아침 식사 시간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이 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제나를 데리고 어제 올랐던 능선의 반대편 능선으로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마을 바로 옆에는 돌담으로 구분지은 작은 경작지들이 있었고, 경작지들 사이의 좁은 돌담길에서 양 떼와 당나귀를 몰고 목초지로 가는 양치기 어르신을 만나기라도 하면 돌담에 바짝 붙어 서서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주곤 했다. 제나는 한 손에 야생화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로 앞으로 지나가는 순한 양과 당나귀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경작지를 지나면 섬의 끝을 돌아오는 길이 나오고, 그 길은 키 큰 나무들이 모여 있는 숲길로 연결되었는데, 그 길은 다시 동네의 좁은 돌담 골목길로 이어졌다. 섬 자체가 워낙 가파르기 때문에 섬 어디에서든지 호수가 바라다 보였고 투명한 아침 햇살 아래 호수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돌담 안으로 소박한 살림들이 들여다보이는 집들을 넘겨다보며, 당나귀 똥이 말라 부서진 가파른 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꼬빠까바나로 돌아가는 배는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배가 떠나는 시간에 맞춰 인디오 여인 둘이 쓰레기 바구니를 등에 메고 집게로 쓰레기를 주우며 돌이끼가 낀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소중한 전설을 품은 자신들의 섬을 지키는 그 모습이 예뻐서 그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부끄러웠는지 자꾸만 계단 옆 나무 뒤로 숨었다.
꼬빠까바나로 돌아가는 배는 어제 올 때 보다 힘이 좀 없는 듯싶더니 중간에 시동을 두 번이나 꺼뜨렸다. 그러더니 세 번째에는 시동이 꺼지고 한참을 지나도록 다시 시동을 걸지 못했다. 급기야 배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빙그르르 돌기 시작하자 승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수 위에서 30여분을 떠있었다.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빛이 호수에 반사되어 몸이 뜨겁게 익어갈 무렵 2층에 앉은 여행자들은 만약의 경우 배가 수리되지 않으면 어떻게 호수에서 탈출할지에 대해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토론을 벌였다.
한참을 뚝딱거리다가 배의 크기에 비해 출력이 작은 스페어 모터로 교체하고 간신히 출발했으나 속도는 현저히 낮았다. 그나마 스페어 모터마저 꺼지면 대책이 없었으므로 승객 모두 한마음으로 스페어 모터의 목숨이 끊기지 않기를 빌며 꼬빠까바나 선착장에 도착하기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어렵게 목숨을 부지하고 꼬빠까바나로 돌아온 우리는 무사생환을 기념하여 호숫가 12번 식당에 들러 뚜루챠 디아블로를 먹은 후, 숙소에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아들고 페루의 꾸스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자정이 다되어서야 볼리비아의 출국 사무소에서 도착해 버스에서 잠깐 내려 출국 도장을 찍고 다시 버스로 올라탔다. 페루 입국 사무소에서 입국도장을 찍기 위해 잠깐 내렸는데 나스까 라인의 원숭이 꼬리 모양을 따온 Peru(페루)라는 글자 로고가 눈에 띄었다. 버스를 바꿔 타거나 버스에서 짐을 내릴 필요도 없는 간단한 입국절차 하며 프로다운 국가 로고까지 역시 남미의 대표 관광국답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원하는 호스텔로 가자고 하니 택시기사는 같은 이름의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런 일을 자주 겪었던 모양인지 야간 근무를 하고 있던 호텔 직원은 기계적으로 지도를 꺼내 들고 호스텔의 위치를 슥슥 표시하고는 아무 말 없이 내게 건네줬다. 택시기사의 착각 덕분에 한밤중의 꾸스꼬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는 호사(?)를 누리고 나서야 원하는 호스텔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