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의 재즈 향연

상파울루, 이비에라 뿌에라 공원 - 2015/04/23(목)

by 민경화

처음에는 빠울리스타 대로에 위치한 상파울루 미술관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집주인 올디마가 아이들과 함께 가기에는 여러 미술관이 함께 있는 이비라 뿌에라 공원이 더 좋을 거라고 추천해주기에 망설이지 않고 목적지를 변경했다.

아이들이 지치기 전에 먼저 미술관을 둘러볼 요량으로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미술관으로 향했다.

근대미술관과 현대미술관에는 다양한 작가들의 회화, 조각, 사진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민속 기예 박물관에는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민속공예품과 생활용품, 의상, 조각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브라질의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전시 작품들을 관람하고 나니 브라질 사람들의 기질이랄까, 그들의 DNA 속에 흐르는 공통의 특징에 대해 조금이나마 감이 오는 듯했다.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초록색 등 원색의 강렬한 조화가 돋보이는 회화 작품들과, 야생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민속 공예품과 조각들이 가진 독특한 질감과 그 속에 함축된, 오감을 자극하는 느낌들은 글이나 말로 표현된 설명을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여행 전에 특별히 계획했던 바는 아니지만, 앞으로 남미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그 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에 들러봐야겠다. 예술 작품이야말로 그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라도 알았으니.

24432C36560962171824F7 근대 미술관 - 흑인 노예제도에 대한 풍자를 담은 작품
2406483C5609692D2BB841 현대미술관 - 여러가지 동물들이 모여 하나의 심장을 이루는 작품. 통합된 브라질을 상징하는 듯 하다.
DSC01133.JPG 민속기예박물관 - 식민시대 이전의 브라질 민속의상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와 근처의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부실한 아침 식사로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울 제대로 된 식사를 원했던 우리의 바람과 달리 카페테리아에 걸린 사진 속 음식들은 햄버거나 핫도그 같은 간단한 음식이 전부였다. 메뉴판에는 제법 음식 이름이 많았지만, 음식에 대한 영어 설명도 없이 포르투갈어로만 된 음식 이름과 가격만 표기되어 있었으니 난감할 노릇이다. 그냥 맨 첫 줄에 있는 음식(아무래도 대표 음식일 테니)을 주문해야 하나 하며 당황해하는 우리에게 한 남성이 다가와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그는 포르투갈에서 온 승무원이었는데 언젠가 제주도의 푸른 바다에서 서핑을 하는 꿈을 갖고 있다고 했다. 1년 전에 있었던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승무원들이 왜 그렇게 대처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한국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상파울루 외곽의 드넓은 공원에서 이루어진 그와의 조우는 정말 놀라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도움으로 메인 메뉴를 정하고 그가 강력히 추천한 수탕 수수 주스도 주문했다. 즉석에서 짜낸 신선한 사탕수수 즙에 레몬 즙을 섞어 내온 이 음료는 신선한 사탕수수 향을 품은 부드러운 달콤함에 레몬의 산뜻한 향이 더해진 아주 훌륭한 맛이었다.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그는 음료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젠가 제주도에 갈 계획이 생기면 연락하겠다고 하기에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세상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은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참 기분 좋은 일이다.

27238D34560966111A8354 미술관 옆 야외 카페테리아에서의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

공원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공원 호수에는 검은 털에 빨간 부리를 가진 고니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고, 산책로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기에 공원 후문에서 자전거 두 대를 빌렸다. 제나를 내 앞에 태우고 형주와 함께 나란히 공원을 돌아보자니, 공기는 더웠지만 상쾌한 바람도 느낄 수 있었고 이국적인 나무들과 공원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서 우리 모두 한껏 마음이 들떴다.


2712A53B56096B6A25A244 사람이 다가가도 놀라지 않는 검은 고니 한 쌍
227FE83B56096B6E343D74 공원내 화장실 벽에 그려진 재미있는 벽화
2611A63B56096B7125D24D 공원내 풍성한 브라질 야자수들


237BCE3B56096B74374B52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

그러다 일이 터졌다. 아마 기분이 너무 들떠서 그랬을 것이다.

자전거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서로 몸을 부딪히며 장난을 치다가 형주 손에 들려있던 휴대전화가 땅바닥에 떨어져 액정이 산산조각 나고 만 것이다. 내가 가져간 휴대전화와 형주의 휴대전화, 그리고 혹시나 휴대전화를 분실할 경우를 대비해 가져간 소형 디지털카메라가 우리가 가진 촬영 도구의 전부였는데, 여행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그중 하나를 망가뜨린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티격태격하느라 얼굴을 구기고 있었는데, 숙소에는 그 침울 모드를 한방에 날려줄 반가운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주인 올디마가 자신의 아들, 딸인 열두 살 피터와 일곱 살 이사벨을 데려온 것이었다. 그의 아이들은 평일에 엄마와 지내고 주말에만 아빠와 함께 지냈는데, 내일 리우로 떠나는 우리를 만나게 해주려고 오늘 저녁 식사에 불렀단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두 살 차이인 이사벨과 제나는 서로 손을 잡고 인형놀이도 하고 함께 그림도 그리며 놀았고, 사춘기의 두 사내아이들은 서로 게임 얘기를 하며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올디마는 비건(Vegan)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닭고기 요리와 베이컨을 준비했고 평소에 먹는 브라질식 샐러드와 흰콩 요리와 쌀밥으로 풍성하게 식탁을 차렸다.

식사 후에는 현지인들과 어울려 놀려고 한국에서 가져온 윷가락으로 브라질 가족 대 한국 가족으로 팀을 나눠 윷놀이를 했는데, 아무리 게임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일부러 져주려고 애를 써도 번번이 우리 가족이 승리하고 말았다.

대학 교수이며 작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올디마의 집에는 드럼과 건반악기와 전자 기타 등 온갖 종류의 악기들이 있었다. 그의 집에 머무는 2박 3일 동안 악기들에 관심이 많았던 형주가 그것들을 살짝 만져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했었다. 윷놀이가 끝나고 형주가 올디마에게 드럼을 연주해 봐도 되냐고 물어보자 그는 흔쾌히 함께 연주하자며 형주의 드럼 연주에 자신의 기타 연주를 얹었다. 그러자 올디마의 딸 이사벨이 탬버린을 치고 제나가 엉터리로 건반을 치며 순식간에 4인의 글로벌 가족 밴드를 결성하였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즉석 연주를 하는 올디마와 형주, 아빠와 오빠 사이를 뛰어다니며 신나게 탬버린을 흔들고 아무 음이나 꾹꾹 눌러대는 두 딸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은 묘하게도 멋진 조화를 이루며 늦은 밤 상푸울루의 주택가에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올디마의 가족에게도 우리 트리오에게도 오래도록 기억될 멋진 밤이다.


9950B23359ED452F31189D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두 소녀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DSC01163.JPG 글로벌 가족 밴드의 멋진 재즈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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