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세에 데뷔작으로 돌풍을 일으키다

이옥선 작가 <즐거운 어른>

by Cha향기

여고 시절, 교회에서 만난 H는 동문 선배다. 그러고 보니 H 선배와 어언 반세기를 함께 지내온 셈이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마치 혈육처럼 지낸다. 그래도 H는 진주에, 나는 인천에 살고 있으니 거의 만나지 못한다. 이번에 그 선배가 진료차 서울에 온다고 하기에 오랜만에 서로 얼굴을 보기로 했다.

선배는 서울에서 하룻밤 묵어야 한다며 여고 동문회관을 예약했댔다.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 그런 숙소가 있으니 지방에 사는 동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겠다. 숙소는 남부 터미널 부근에 있었고 역세권이었다. 한낱 오피스텔이지만 식탁, 빨래 건조대, 책장, TV 등이 갖춰져 있고 주방과 욕실도 쓸 만했다. 펜션이나 콘도로 손색없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숙소를 관리하고 청소하는 모양이었다.

진열장에는 여고와 관련된 다양한 파일과 책이 꽂혀 있었다. TV장에는 '일신 문학' 동문 문예지가 몇 권 놓여 있었다. 문예지 책날개에 <즐거운 어른>이라는 신간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그 문구를 읽다가 빵 터졌다. 그 책 벨리 밴드(종이띠)에는 눈길을 끄는 홍보 문구도 있었다.

76세 데뷔작으로 3관왕이 된 돌풍의 에세이시스트
올해의 신인상, 올해의 책, 올해의 저자 – 벨리 밴드

▲ <즐거운 어른>


즐거운 어른


H 선배와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이튿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선걸음에 도서관으로 향했다. 휴대폰에 깔린 도서관 앱에서 검색해 보니 그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 책을 홀라당 놓칠세라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예약했다.


책을 대출하여 표지에 있는 그림을 보니 그 리얼함에 혀를 내둘렀다. 간단하게 그린 캐리커처였건만 오글거리게 그린 그림이 다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만 봐도 책 내용이 익살스럽고 유머가 가득할 것 같았다. 목욕탕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여자 어른의 알몸 뒤태라니. 목욕탕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숙덕대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그림을 더 눈여겨보니 여자 어른들 몸이 쭈글쭈글하지 않았다. 여전히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그림이었다. 심지어 그들의 엉덩이는 요염했다.


표지 그림을 보다가 터진 웃음보를 겨우 수습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부터 거침없는 입담으로 작가는 소신 발언을 해댔다. 76세, 그 나이쯤에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배포가 생기나? 마치 바로 앞에서 소리를 내어 이야기하는 듯한 글이었다. 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소리를 글로 변환해 놓은 듯했다. 그러다 보니 가독성에 모터를 단 것처럼 죽죽 읽혔다.


글 속에 위트와 개그가 가득했고 문장마다 명언이었다. 작가는 명언 제조기였다.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을 뒤집어엎는 촌철살인의 표현도 많았다. 인생을 살아본 자만이 명쾌하게 내릴 수 있는 명제가 가득했다. 그런 장면에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가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동서양의 명작을 틈틈이, 적재적소에 인용했다. 작가가 한평생 해왔을 독서량이 가늠됐다. 그러잖아도 시원시원한 작가의 말에 그런 명작 속에서 발췌된 글이 덧입혀지니 글맛이 더했다. 작가의 철학과 사유가 글 속에 서슴없이 아웃풋 되고 있었다.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어떤 소재나 주제에도 재미를 버무리니 글이 잘 읽혔다. 굳이 두어 편 골라보라고 한다면 '골든에이지를 지나며''Those were the days'였다. 내가 낄낄거리며 책을 읽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남편이, "나도 한 편만 읽어볼까? 재미있는 것 하나만 추천해 줘"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책의 인플루언서가 된 격이다. '나의 플레이리스트'라고 남편에게 말해주고 그 소제목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골든에이지를 지나며'에서, 작가는 76세를 골든에이지라고 여기고 있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 수업>(류시화 옮김)이라는 책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우리 삶의 교사라고 했다면서, 삶은 "기회이며 아름다움이고 놀이"이므로 "그것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라고 했다. 작가는 나이가 많다고 느끼지 않는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으며 지금까지 먼 길을 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라는 말을 한다. 맑은 정신과 건강한 몸을 지닌 작가는 골든에이지를 누리고 있는 게 맞다.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Those were the days'에서는 꽃밭과 꽃다발, 장작 들여오던 날, 우물 치는 날, 널뛰기 등, 추억 몇 편을 소개했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진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글 속에는 역사와 문화가 잔잔하게 배어있었다. 작가의 가정사와 이웃, 마을의 모습도 그려졌다. 글이 참 따뜻했다. 아련한 추억을 소환해 준 글이기도 했다.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작가가 헬스장에 갈 때 좋아하는 책과 휴대폰을 꼭 챙겨간다는 말로 시작된다. 나도 3개월째 헬스장에 다니고 있던 터라 이 글이 더 잘 공감됐다. 작가는 헬스장 자전거를 탈 동안에 책을 읽곤 하는데 키케로가 쓴 <노(老) 카토 노년론>(김남우 옮김)을 읽다가 하염없이 자전거를 탔던 얘기도 했다. "기원전 106년에 태어난 키케로의 말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했다. 나도 작가의 말에 공감이 되었으며, 시대를 초월하여 노년에 관한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육지를 바라보며,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항구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네. 하지만 노년의 마지막 날이 정해진 바가 없는 고로, 의무의 과업을 돌보고 수행하며, 그러면서도 죽음을 가볍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삶을 이어가는 것이 노년의 올바른 삶이네. 그렇게 노년이 청년보다 더 대담하고 용감해지는 것이지"라든지, "누구도 나를 눈물로 배웅하거나 장례식을 통곡으로 채우지 말라" 또는 "이 세상의 소란과 홍진을 떨쳐버리게 되는 날은 얼마나 아름다운 날인가!" - 177P


또한 작가는 러닝머신을 탈 때는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합창단원이었던 작가는 노래를 잘 부르는 모양이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꼭 불러보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그 기회를 놓쳤단다. 그래서 그 곡을 그분의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음악을 유난히 좋아했던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로 넘어간다. 작가의 부모님이 언제부턴가 춤바람이 났고 두 분이 남강 카바레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눈썹이 숯검댕이에다 요즘 나타나셔도 미남이라 할 만했으니 이런 아버지를 대동하고 카바레를 간 어머니를 나무라야지 어쩌겠는가. 드디어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버린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좀 먹고사는 집 남자들은 대부분 첩이라는 존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분노를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 183P


이렇게 적나라하게 아버지의 일탈을 까바치는 딸내미의 입담이 걸쭉했다.


호탕한 작가


책 뒤표지에 있는 작가의 말이 비타민처럼 시원했다.

•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 절대 유명해지지 마라
• 내 꿈은 고독사
• 너 아무도 안 쳐다봐!
• 여자라면 의리
• 젖가슴이 큰 게 그리 좋은가?
• 남자 잘못 만나 인생 망한 여자는 있어도 안 만나서 망한 여자는 없단다
기상천외한 명언들을 일상에서 뿜어내는 이 즐거운 어른이
인생의 골든에이지를 살아가는 방법
나는 바로 이런 할머니를 기다려왔다. 자신의 지력과 오랜 독서력으로 세상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맵싸한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할머니. 따뜻한 할머니는 품어주지만, 까칠한 할머니는 해방시킨다. 부모가 자식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한데 자식이 부모의 성숙을 지켜보는 기쁨도 못지않게 크다. 우리 엄마가 마침내 이런 할머니가 되었다. 자식으로서 무척 자랑스럽다. - 김하나(작가, <여둘톡> 팟캐스터)


존경스러운 동문


76세에도 책을 발간한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그런 걸 보면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무색하다. 이제는 아무래도 '인생은 80부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커피 향 가득한 카페에서 작가와 마주 앉으면 밤을 새워도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인생사 특강을 수다 떨 듯이 듣고 싶다. 바로 옆에서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글 톤을 보아 분명 말솜씨도 장난 아닐 것 같다.


그러면서, 1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나도 작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늙어가고 싶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멋있는 모습으로…. 그래서 이옥선 동문은 나의 롤모델이며 로망이 되었다.


전업주부로 살아왔고 남편을 배웅하여 인생의 숙제를 끝낸 뒤에 이어지는 노년의 일상을 기록한 책이 내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젊은 세대, MZ 세대들은 이 작가의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혹시 꼰대라고 하진 않을까? 어쩌면 그들은 이런 어른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팔자가 늘어진 최고의 인생 한 시절"이라고 표현하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을 최대한 즐긴다. 그야말로 카르페 디엠!"을 외치는 어른을 이 책에서 만났다. 그것도 동문 선배를.


10년을 부지런히 달려 76세에 이르려고 새 신발을 하나 마련했다. 아직도 내겐 시간이 꽤 남아있다. 나는 시간 부자이며 앞날이 창창하다.


그걸 내게 깨닫게 해 준 책이다.




독후 활동 및 덧붙임


독후 활동으로 표지 그림(목욕탕 풍경)을 모작해 봤다. 이글이글 타는 목욕탕 안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싶어서 주황빛 종이에 그렸다.

▲<즐거운 어른> 책 표지 그림 모작

P.S.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오, 소중한, 그러나 절망으로 가득한 기억들
선지자의 황금 하프여
어찌하여 버드나무에 걸린 채 잠잠히 있느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바벨론 강가에서 요단강을 그리워하며 울었네' 중에서)


즐거운 어른 이옥선 (지은이), 이야기장수(2024)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1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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