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토요일 저녁이었다. KBS <불후의 명곡>을 시청하면서 가수, '린'을 처음 알게 됐다. 그날 '린'은 최백호의 노래, '애비'를 불렀다. 그 노래를 처음으로 들었다. '린'이 부르는 '애비'라니...
'애비'를 들으며 남편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남편의 애절한 눈물을 보며 나도 울음을 터뜨렸다. ISFP 성향인 남편이, 딸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담은 '애비'를 들으며 울지 않는 것도 이상할 일이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린'의 무대를 보며 우리 부부는 그동안 딸내미를 아예 돌아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때는 아들이 사고를 당한 지 4년 정도 됐을 때였다. 우리의 삶은 병원 노마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딸의 아픔, 딸의 외로움을 챙길 여력이 우리에겐 없었다.
아들이 사고를 당하여 대수술을 거쳐 병원 생활을 막 시작했을 당시에, 우리는 포항에 있는 병원의 특실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냈다.
"자네는 이러면 안 되지."
어느 날, 딸내미의 교수님이 병문안 오셨다. 한 가족 모두가 카타콤 속 삶처럼 지내는 모습에 기가 막히셨던 모양이었다. 한 발만 물러서서 보면 그런 게 보이는 법이다.
"일단 병실에서 나오게나. 이러면 진짜 큰일 나요."
교수님은 딸내미에게 가족과 엉겨 붙어있지 말고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채근하셨다. 다행히 딸내미는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병실을 떠났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응원단을 창단하고 공연 무대를 올리며 분주히 자기의 자리를 찾았다. 이어서 남편도 교회 강단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쉽게 그 자리를 털고 나올 수가 없었다. 6개월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복직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서서히 일상을 회복해 나갔다.
아들이 의식을 잃고 기약 없는 병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직장이고, 세상 살이고, 다 부질없게 여겨졌다. 영화나 TV도 볼 수 없었고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오로지 아들의 생사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우리는 병실 속에서 지내며 바깥세상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어떻게 된다면 나도 더 이상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3~4개월이 지난 어느 날, 골목의 담장에 피어있던 개나리와 벚꽃을 보고 화들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렇게 계절조차 잊고 지냈다.
그나마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 보며 위로가 되기도 했는데 딸내미는 혼자였다. 우리는 우리의 구멍에 매몰되어 딸내미의 트라우마를 돌아보지 못했다. 아들의 사고로 인한 충격을 받은 정도로 치자면 딸내미가 더 심했을 텐데...
오누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지냈고 뉴질랜드에서도 같이 지낸 적이 있다. 게다가 같은 대학에 다녔으니 남매는 유달리 함께 지냈던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 아들의 부재감을 우리보다 딸내미가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사고 당일에 그 뒷수습은 딸내미 혼자 다 해냈다. 왜냐하면 우리 부부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놓고 잤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에야 겨우 딸내미와 연락이 닿았다. 밤새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 당시에 우리 반 학생들이 아무 시간에나 전화를 해댔기 때문에 무음으로 해두고 잠을 잤다.
아들은 캠퍼스에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다. 사고를 당했을 때는 의식이 있었다. 자신의 자전거를 묶어 열쇠로 채웠고 119도 직접 불렀다. 함께 동승한 학우와 대화도 하면서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검사하는 도중에 의식을 잃었던 케이스다. 아들은 부모나 누나가 걱정할까 싶어서 친구들만 병원으로 불러냈다. 그래서 아들에게서 온 부재중 기록은 없었다. 아들은 가족에게도 자신의 사고를 알리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감당하다가 의식을 잃은 셈이다.
<불후의 명곡>에서 '린'이 부르는 '애비'를 듣는 순간, 딸내미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던 것이 생각나서 너무 가슴 아팠다. 아마 남편도 그런 마음에서 펑펑 울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딸내미는 아직 결혼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딸내미를 결혼시킨다면,
가물어 말라 터진 논바닥 같은
가슴이라면 너는 알겠니
비바람 몰아치는 텅 빈 벌판에
홀로 선 솔나무 같은 마음이구나
'애비' 노래의 가사와 같이 딱 그 마음일 것 같았다.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바람맞으며 홀로 서 있는 솔나무 같은...
남편은 그때부터 '애비'를 흥얼거리곤 했다. 그것이 기도하는 맘이 되었는지 딸내미는 그해 10월에 결혼하게 됐다.
"엄마, 아빠, 울지 마세요. 좋은 날이야."
어느 결혼식이든 뭉클하지 않던가. 그런데 딸내미가 결혼하는 날인데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그것도 크나 큰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결혼하는 우리 딸내미의 결혼식인데... 우리가 울면 하객들도 울 것이고 신랑, 신부도 울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쁜 날에 울음바다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딸내미가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딸내미가 하도 부탁하니 우리 부부는 미리 눈물샘 꼭지를 야무지게 잠그고 혼주석에 앉았다.
"아빠가 '애비'라는 노래로 축가 부를까?" 내가 농담반, 진담 반으로 딸내미에게 물었다.
"안돼, 안돼. 그거 부르면 모두 울게 될 거예요."
그래 그래 그래 울지 마라
고운 드레스에 얼룩이 질라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애비 부탁은 그것뿐이다
그 이후로 남편은 기회가 되면 '애비'를 불렀다. 간주 타이밍에는 꼭 딸에게 보내는 내레이션을 넣기도 했다. 아들을 간병하느라 딸내미에게 신경을 써 주지 못한 미안한 맘을 그 노래로 풀고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오랜만에 '애비', 그 노래 한 번 불러주세요."
남편에게 부탁했다. 남편은 정통 트로트는 쉽게 부르는 편이다.
"이건, 쫌 그런데..." 남편이 주저했다.
"그래도 마음을 전달하는 의미로..."
남편이 딸에게 보내는 마음을 담아 '애비'를 불렀다. 그 녹음 파일을 받아 MP4로 변환한 후에 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다. 남편에게 자신이 부른 '애비'로 만든 뮤직 비디오 한 편을 전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6tpjTxxZJc&t=98s
올해였다. '린'을 우연히 <현역가왕>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발라드 가수였던 '린'이 현역 '0 연차'로 그 오디션 프로그램 경연자로 출연한 것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그런데 '린'은 올라운더였다. '린'은 그 어떤 현역 트로트 가수 못지않았다. 트로트 가수로 손색이 없었다. 결국 '린'은 그 오디션에서 'TOP 7'에 안착했다.
'TOP 7'은 <한일가왕전>이라는 후속 프로그램으로 연계됐다. PD의 감각이 대단해 보였다. 일개 방송일 따름인데 마치 국가 간 대항과 같은 몰입감을 주는 프로였다. 일본에서도 <현역가왕>이라는 오디션으로 'TOP 7'을 선정한 모양이었다.
일본의 'TOP 7' 중에 '마코토'라는 가수가 있었다. '마코토'는 '린'의 찐 팬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대놓고 '린'에 대한 팬심을 드러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OST 여왕인 '린'을 좋아했을 것 같다. '마코토'는 '린'의 모든 노래를 다 안다고 했다. 특히 '린'이 'My destiny'라는 곡을 부를 때는 감동에 겨워 울고 있었다. 그 정도면 찐 팬이 맞다.
그런데 <한일가왕전> 2화에서 '린'과 '마코토'가 대결하는 '1:1 라이벌전'이 있었다. '마코토'는 '린'을 눈앞에서 보는 것도 감동인데 라이벌 전에서 '린'과 겨루는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고 했다.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린'은 '북녘의 숙소에서'라는 노래를 일본어로 불렀고 '마코토'는 '약속'을 한국어 버전으로 불렀다.
'마코토'는 발음은 물론 가창력도 좋았다. 또한 깨끗하고 담백하게 노래를 잘 불렀다. 그렇지만,
115: 85 = 린: 마코토(총합산 점수는 200점)
이런 점수 차이로 '린'의 승리였다.
그 무대에서 '마코토'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했다.
자신은 '린'의 영원한 찐팬인데 '린'이 자신의 팬이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마코토'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떨떨했다. 기가 막힌 표현이었다. 나도 '마코토'의 말을 패러디하고 싶었다. 가장 사랑하는 브런치 작가 '소위'님께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소위'라는 브런치 작가님이 있다. 그분은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라는 연재 브런치 북을 집필 중이다.
내가 어느 순간에 '소위' 작가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위' 작가님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그리고 다음 글이 발행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에 내가 박완서 작가님께 빠져들었을 때의 마음과 흡사했다.
처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박완서 작가님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신문 연재를 읽은 후부터였다. 그때 신문이 당도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소위' 작가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글은 이렇게 쓰는 거지,라고 혼자 중얼거리게 된다.
'소위' 작가님의 글은 파스텔 색상으로 그리는 수채화 같았다. '소위' 작가님은 마음을 그리는 '마음 화가'였다. 우리 자신이 간과해 버릴 사소한 마음 자락을 꼼꼼하게 챙겨 그 갈피를 잘 펼쳐 보이는 마법을 지닌 작가였다. 원색 그대로 팩트만 전달하는 글을 쓰는 나와 비교가 되었다.
"완벽한 글을 쓰시네. 손색이 없는 글이네."
'소위' 작가님의 글을 읽은 후, 남편이 했던 글평이다. 남편에게 소위 작가님의 글을 한 편만 읽어보라고 부탁했었다.
'린'의 찐 팬인 '마코토'처럼 나도 '소위' 작가님의 찐 팬이다.
'소위' 작가님이 내 팬이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브런치를 들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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