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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균 여행기자 Mar 10. 2020

인생라면

#2 한 그릇을 위한 12시간의 준비


라면을 언제부터 먹었을까,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라면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신라면이다. 할머니 댁 거실에서 점심으로 먹었는데, 다 끓인 후 참기름을 살짝 더한 라면이다. 그 맛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가끔 그 맛이 그리워 똑같은 방법으로 끓여 먹는데,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 항상 기분이 좋다. 그렇게 라면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됐고, 오래된 친구처럼 찰싹 붙어있다. 


뜬금없지만 라면을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한다. 한창 먹을 때는 하루에 한 끼는 꼭 라면으로 해결했다. 면이 좋아서, 밥과 먹을 국물이 필요해서, 신제품이 나와서,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핑계는 끝도 없이 댈 수 있다. 종류도 얼마나 다양한가. 봉지라면부터 컵라면, 짜파구리 같은 변화구까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게 라면이다. 또 시험이나 취업을 준비할 땐 싼 가격에 포만감도 커 자주 흡입했다. 쌀밥만 더해도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또 한창 먹성이 좋을 땐 술자리의 끝은 항상 라면이었다. 얼큰하게 취하고, 허한 배를 컵라면 한 그릇으로 달래곤 했다. 짝사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요즘엔 예전만큼 자주 먹진 않지만 쌀쌀한 바람이 불거나 바다를 보면 그렇게 한 젓가락이 생각난다. 그중에서도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라면은 여행 또는 출장 가기 전에 공항 라운지에서 생맥주와 함께 즐기는 컵라면이다. 비행 전 즐거움이 최대치로 올라가는 순간이다. 


이렇게 수없이 후루룩 후루룩을 반복했는데 정작 인생 라면은 비행기 안에서 만나게 됐다. 물론 이 한 그릇을 가장 맛있게 즐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부터 기내식까지 모두 양식과 와인 위주로 먹었다. 그 사이 밥과 김치 등 한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디저트도 에스프레소와 아이스크림 등으로 빨갛고 칼칼한 먹거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저녁 12시에 먹는 기내 라면을 기다렸다. 


이윽고 북어포가 들어간 라면과 우유가 내 앞에 놓였다. 퍼스트 클래스를 타면서 어떠한 음식과 술보다 더 기다렸던 라면을 보니 1등석에 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싱겁다, 덜 익었다는 후기도 많아 약간의 걱정과 함께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욕심을 내 면을 한 움큼 떴다. 후후 불며 한입 가득 넣고 씹는 순간, 진심으로 감동했다. 지금까지 먹었던 라면을 싹 잊게 만들 정도였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마치 미슐랭 3스타의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말이다. 고추의 매콤함, 북어포의 시원함이 쫄깃한 면과 어우러진 최고의 라면이었다. 정신없이 비워내고, 고소한 우유로 마무리를 하니 완벽한 하루의 마지막 퍼즐이 완성됐다. 


지금껏 라면과 함께 여러 재밌는 순간을 맞이했지만 어떤 라면이 최고였냐 묻는다면 단연 대한항공에서의 한 그릇을 꼽겠다. '언제쯤 이 한 그릇을 뛰어넘는 라면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11월2일을 기분 좋게 떠나보냈다.  


퍼스트 클래스 탑승 전에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얼마나 찾아봤던지 기내식 메뉴를 외울 정도다. 그 메뉴판이 눈 앞에. 이제 여행 시작이다. 

우선 샴페인과 연어로 시작. 샴페인은 페리에주에 벨에포크 2012로, 포도 작황이 꽤 좋았던 빈티지라고 한다. 기포가 죽지 않고 쉼 없이 올라오고, 산딸기, 장미 등 라즈베리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또 단맛이 많지 않아 식전, 식중, 식후 등 전천후로 어울린다. 

아쉬운 점은 에피타이저가 연어라는 거. 너무 평범하다. 

본격적인 코스의 시작은 푸아그라 테린으로. 달달한 잼과 바게트를 곁들이니 금상첨화. 곁들인 와인은 달달한 소테른이다. 잼과 소테른 동시에는 먹기에는 지나치게 달달해서 소테른 마실 때는 푸아그라만. 이러면 궁합이 딱이다.

푸아그라 테린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렇게 하늘에서 먹은 적은 처음이라 무척 흥미로운 경험으로 기억에 남았다. 

이때부터 이미 텐션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갔다. 분명 라운지에서 점심 든든하게 먹었는데 계속 들어간다.

이런 호사를 비행기 안에서 누리다니. 이게 퍼스트의 맛인가. 

홍피망 퓨레 스프. 이걸로 배를 채울 수 없기 때문에 한 입만 먹고 패스. 인상적인 맛은 아니다. 그리고 2가지 화이트 와인도 받고. 프랑스 샤블리와 알자스 게뷔르츠트라미너. 샤블리가 확실히 드라이하고 게뷔르츠트라미너는 그보단 살짝 더 단맛이 있지만 이것도 미디엄 드라이 정도. 

한국의 미가 들어간 그릇. 이렇게 심플하면서도 확실한 포인트를 주는 문양이 참 예쁘더라.

샐러드 코스. 오이 빼고 적당히 섞어서 달라고 했다. 앤초비도 들어가고. 소스는 아마 레몬이었던 것 같다. 

메인은 스테이크. 두께랑 양 보이시나요. 300g은 족히 될 것 같다. 대한항공의 자랑 제동한우. 

기내식 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청정제주 한라산 400m 산기슭에 위치한 제동목장. 삼나무 숲과 목초가 어우러진 목장에서 천연 화산 암반수와 양질의 건초 등 무항생제 사료로 사육한 제동한우는 특유의 부드러운 육질과 풍부한 육즙 및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고 적혀 있다. 이게 퍼스트 클래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라 바로 선택.

미디엄으로 요청했고 굽기도 정확했다. 실제로 맛도 굉장히 좋았다. 진한 육향과 감칠맛이 훌륭했다. 지방에 파묻혀 녹는 맛이 아니라 적당히 씹는 맛이 있어 취향에 딱 맞았다. 소고기 스테이크 선호하지 않지만 이런 맛이라면 충분히 좋다. 거기에 보르도 지방 포므롤 지역의 샤토 네넹 2008과 루이 라투르 꼬르통 그랑 크뤼 2014 2가지 레드와인과 함께 하니 아주 훌륭한 정찬이었다.

중간중간에 레몬 드레싱의 샐러드로 입안을 개운하게 해 주면 계속해서 들어갔다. 다 먹게 될 줄 몰랐는데 옆에 곁들인 토마토 팍시랑 구운 감자를 빼고 고기는 깨끗하게 비웠다.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던 기내식.

치즈와 과일. 푸름 당베르는 적당히 꼬릿꼬릿한 블루치즈고, 가운데 까망베르는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치즈. 그런데 맨 앞에 문스터(?)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저 치즈는 진짜 대박... 그냥 시골 그 자체다. 그 초원에서 풍기는 거친 시골의 향. 먹으면 좀 덜하고 고소하긴 한데 쉽지 않았다. 좋은 경험.

당도 높은 과일로 입가심하고.

케이크는 퍼석퍼석해서 한 포크하고 놔뒀다. 대신 시원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대장정을 끝냈다. 아이스크림은 진리.

프레스티지에 본격적인 바가 있고, 퍼스트에도 간이 바가 있다. 이때 주제가 와인이라 위스키는 전혀 손도 안 댔다. 그냥 구경과 인증샷 정도만 남겼다.

놀다가 오니 이불이 펴져 있었고. 비행기 안에서 눕는 거 자체가 나름 신선한 체험이다. 

파리뽕 채우기 위한 영화 '미드나잇인 파리'.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번에 벌써 다섯 번째. OST는 무한 반복. 파리 여행을 위한 최고의 준비물이다. 볼 때마다 예쁘다. 그리고 비 오는 파리를 상상하게 만든다. 영화 다 보고 퍼스트 클래스를 타면 느꼈던 감상을 잠시 남겨봤다. 안 자고 멀뚱멀뚱 있으니 승무원분께서 막 구웠다며 맛있는 쿠키도 전해줬다. 이때 여전히 배가 빵빵해서 다 먹진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다시 먹고 싶다. 

그리고 정점을 찍었던 라면. 북어포로 국물은 좀 더 시원하고, 약간의 고추로 좀 더 매운맛을 강조했다. 면도 꼬들꼬들. 사진만 봐도 침이 흐른다. 그때가 좋았다. 그리고 얼얼한 혀를 달래주는 우유까지. 완벽한 마무리다.

한 젓가락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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