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마라톤의 슬로건 중 하나로 이런게 있었다.
5만개의 스토리,
단 하나의 피니쉬라인.
본디 마라톤이란 5만명이 완주하면 5만개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법.
같은 사람이 마라톤을 두번 뛰면 두번 다 다른 스토리가 만들어지는것도 당연한 진리다. 같은 코스를 또 뛰어도 말이다.
납치
4시간 이상을 달려 드디어 저 멀리 피니쉬라인이 보였다. 뉴욕 마라톤의 피니쉬라인은 야속하리만치 높은 언덕이다.
400미터앞, 200미터 앞… 촘촘한 거리 표식을 보며 깎아지른듯한 언덕을 기어올라간다.
해냈다는 벅찬 감동,
함께 훈련해온 친구들의 응원,
피니쉬라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한다던데
나는 그냥 다 필요 없고 어서 이걸 끝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끝내고 어딘가에 앉고싶다는 일념으로 피니쉬라인 통과.
뒤에서 들어오는 주자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켠으로 빠져 천식 호흡기 치료기를 들이켠다. 그리고는 바로 봉고차에 낚아채여 납치당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누군가가 나를 휠체어에 태우고 후진으로 어딘가를 향해 급히 간다.
…?
나는 메디컬 스태프에게 납치당했다
순간적으로 혹시 호흡 치료제가 스테로이드라서 도핑 테스트를 하러 가는건가 생각했다. 호흡기 치료제 쓰면서 뛰면 실격인건가..? 잠시 그런 생각도 했다.
100미터쯤 갔나… 코스 안에 수없이 있는 빨간 메디컬 텐트와는 비교도 안되게 큰, 피니쉬라인 바로 옆에 마련된 메디컬 텐트로 들어가니 바로 배번을 스캔하고 배번에 연동되어 미리 등록한 내 인적사항을 확인한다.
오면서도 쉼없이 무전을 치고 몇번 병상으로 가라는 무전을 받더니 헤매지도 않고 곧바로 병상으로 나를 옮겨주었다.
[간호사]라고 크게 적힌 명찰… 이라고 하기엔 거의 우리들이 다는 배번만한 종이를 단 사람이 혈중 산소농도와 혈압을 일단 재고, 마찬가지로 [레지던트]명찰을 단 사람이 쉼없이 타블렛에 입력하고 있으니 [의사]가 나타나 내 손에 들린 호흡기 치료기를 보고 바로 천식이냐고 묻고 청진기로 숨소리를 확인했다.
그 일사분란함과, 야전침대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편안한 침대에 감동 하고 있을 새도 없이 슬슬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 대회 준비를 천식때문에 망치긴 했어도 대회중에 호흡기 치료제를 거의 남용하다시피 하며 뛰어서 딱히 발작이랄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용을 하다보니 혈압이 오르는지 머리가 아파서, 다 뛰고나면 혈압 괜찮은지 재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실려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프지도 않은데 메디컬 텐트에 실려온것도 모자라 나한테 스태프가 무려 6명이나(!!!!) 붙어있는 상황 여간 가시방석이 아니었다. 얼른 일어나서 나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체온을 재던 간호사가 체온계로 재지지 않을만큼 체온이 낮다고 하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얇은 은박지 같은 힛시트로 내 온몸을 감싸고 빈틈이 없도록 발 밑으로 시트를 접어넣어 주고는, 음식점에서 테이크아웃때 주곤 하는 종이로 포장된 라면스프 반만한 사이즈의 소금을 까서 내 입에 털어넣어주었다. 그게 뭔지 자세히 보고있을 정신도 없었고 약간 혼미해지기 시작했는데 의사가 “이건 소금입니다. 똑바로 여기 보세요” 하며 먹여준 기억이 난다.
게토레이도 한병 주면서 마시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스태프가 부직포로 된 담요를 가져와 힛시트 위에 한겹 더 덮어주고 꼼꼼히 여며주었다.
피니쉬라인에서 러너들을 감시(?)하다가 납치범처럼 골라 잡아가는 메디컬 요원들은 아직 증상이 없는 환자도 선별해내는 특수요원들인지, 메디컬 텐트의 야전침대에 누운 후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작년에도 피니쉬 직후에 몸이 덜덜 떨릴만큼 추운 느낌은 있었지만 지급되는 판초를 입고 내발로 걸어 시큐리티 구역 밖으로 나갔는데 이번엔 아마 여기로 실려오지 않았으면 워크오프에서 쓰러졌지 싶을만큼 머리가 아프고 추웠다.
처음엔 천명음이 없다고 했던 의사도 다시한번 청진기를 대보고는 폐가 많이 무리 한 상태라 발작이 언제든 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다.
한참 누워서 쉬고있으니 두통이 어느정도 가라앉는가 싶었는데 그때부터 말도못하게 잠이 쏟아졌다.
나는 원래 아무리 지루한 수업시간에도 졸지도 않고 앉아있는걸로 유명할만큼 공공장소에서 잠을 못자는 체질인데, 아무리 내가 마라톤 한번 뛰었기로서니 오후 3시도 안된 대낮에 이렇게 잠이 쏟아진다고…?
까무룩 까무룩 하고 있으니 스태프들이 잠들지 않도록 팔다리를 주무르며 계속 말을 걸었다. 의사가 “그거” 갖다주라고 하니 스태프중 한명이 테이크아웃 커피잔에 담긴 뭔가를 갖다주고 나를 일으켜주었다. 또한번 친절하게 “이것은 따뜻한 드링크이고, 소금이 많이 함유되어있어요“ 라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보통 미국에서 어린이 병원에 가면 의사가 별것 아닌 처치를 해도 하나하나 도구를 보여주며 이건 뭐고 이걸로 어떻게 할거다를 설명해주는데, 그거랑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내가 심장이나 혈압같이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가 아니라 저체온으로 의식이 흐려지는중이라 더 말을 걸어줬는지도 모르겠다.
그 정체불명의 “그거”를 마시니 짭쪼롬하고 따뜻해서 덜덜거리는 떨림도 줄고 잠도 조금 달아나는게 느껴졌다. 뭔가 라면국물에서 매운맛을 뺀 듯한것이 묘하게 맛있었다.
맛있다고 느껴질만큼 회복이 되어서 스탭들의 질문에 답하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나한테 무려 6명이나 붙어있었는데 다른 병상도 6명씩이었다. 그룹 구성은 의사 1명, 레지던트 1명, 메디컬 학생 2명, 간호사 2명이었다.
내가 알기론 메디컬도 자원봉사자들이라고 알고있었는데, 내가 누워있는 동안에도 쉼없이 새로 들어오는 환자를 전부 수용하면서도 아직도 빈 병상이 있을만큼 메디컬 텐트는 크고 시설이 넉넉했고, 스태프도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그야말로 앞으로는 코스에서 쓰러지도록 뛰어도 걱정없겠구나!
하지만 물론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빡세게 뛰지는 않는다 ^^;;;;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보니 레지던트의 친구가 내 친구였다(!!!!)
그리고 드디어 체온이 오르기 시작해 아직 목표치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내가 이제 그만 가고싶다고 강력이 원해 드디어 나를 퇴원(?) 시켜주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인코스 메디컬은 몰라도 피니쉬라인 메디컬텐트는 생명이 위협받는 사람들만 가는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침대를 비워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니 의사 왈, ‘모든 러너가 안전하게 피니쉬하고, 또 안전하게 집까지 가야지 이 대회가 끝나는거야’
아니 나를 또 이렇게 뉴욕마라톤에 취하게 만들어버려 ㅠㅠ
나 혈중 뉴욕마라톤뽕 농도좀 재줘요. 지금 치사량이니까 ㅠㅠ
그렇게 알수없는 무언가에 취해 가슴 뿌듯하게 메디컬 텐트를 나와
비틀거림이나 휘청임 없이 두발로 척척 걸어가 메달을 받고, 리커버리백을 받고, 판초를 받고…
팀원들과 가족이 기다리는 런클럽 지정장소에 도착했을때,
더없이 큰 소리로 카우벨을 울리고 뿔피리를 불며 맞이해주는 팀원들을 향해 두발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얘들아! 우리 정말 최고다 그치??
뉴욕 마라톤 최고다! 그치??
Let’s do it again!!!!
올해는 마지막 5km 정도를 거의 다 울면서 뛰었다. 아프고 힘들어서도 울었고,
코스에서 응원해주는 팀원들을 보고 또 울었고,
훈련을 제대로 못한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울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니쉬라인이 가까워온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울었다.
한번은 운으로 완주할수도 있는거라고 생각했다.
두번은 안될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리고 나의 두번째 피니쉬가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었기에 눈물이 날만큼 뿌듯했다.
그리고 지금껏 숱한 대회를 뛰며 한번도 가본적 없는 메디컬 텐트를 가보고,
따스하면서도 확실한 서비스를 받으며,
아. 내가 뛰는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게모르게 지원해주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많이 울컥했던 올해의 마라톤.
그렇게 두번째라는 벽을 깨고
세계에서 가장 험한 코스 중 하나인 뉴욕마라톤 2회 완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물론,
나는 돌아갈 것이다.
마라톤이란 모름지기
피니쉬라인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리고 나의 세번째 마라톤, 네번째 마라톤… 수 없이 많은 새로운 드라마를 써 나갈 것이다.
* 묘하게 맛있었던 그 따스한 드링크를 거의 다 마시고 컵 밑바닥을 본 순간, 정체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덜 녹은 부이용 (블록형 치킨스톡)…. 요리를 해본사람은 못 알아볼수가 없다.
어쩐지 되게 맛있더라니.
올해 일년 내내 농담처럼 하고다니던 “마라톤 완주하고나서 냉면육수 한팩 먹으면 딱 좋겠어”는 결국 조금 다른 육수였지만 어쨌든 이뤄졌다는 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