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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Nov 03. 2023

안녕, 그리고 또 만나-라스트 10마일

마라톤 훈련 14주, 15주 차

13주에 생애 최장거리인 20마일에 도전한 후, 장거리를 달리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생겨버렸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마라톤인데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겁을 먹고 마음이 여간 심란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경험자들의 예언(?)대로 사나흘이 지나니 마음이 추스러들고 '그래, 기록에 욕심내지 않고 완주에 목표를 두고 천천히 끝까지만 가자!'라고 다시 마음을 잡았다.



13주 차에 20마일을 뛴 후로는 테이퍼링이라고 해서 약 3주간의 휴식기에 들어간다. 이때부터는 10마일 이상의 장거리를 뛰지 않고, 스피드 훈련도 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부상을 막고 대회날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기 위한 에너지 비축기라고 볼 수 있다. 



훈련은 끝났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당신을 피니쉬라인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팀 코치가 보낸 전체메일을 읽고 마라톤 뽕에 한껏 취하고 있는데, 감동을 받아서 그런가 몸에 닭살이 쫙 돋고 으슬으슬하네... 

아뿔싸. 이게 감동이 아니고 감기였다. 며칠 전부터 우리 집 초등학생이 코를 훌쩍거리길래 "내가 지금 아플 순 없다!!!"며 집 안에서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치밀함까지 발휘했건만... 옮았다. 

코로나를 두 번이나 걸려본 경험으로 볼 때, 코로나는 한번 걸리면 폐활량에 타격이 정말 크게 오기 때문에 당장 키트 검사도 했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다. 



평소엔 감기가 걸리면 그냥 낫겠지 하고 두는 편인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약도 먹고 몸을 사려 한 이틀 만에 다행히 회복되었다. 감기도 나았겠다 가볍게 공원이나 한 바퀴 뛰러 발걸음도 가볍게 달려 나간 그날... 달리기 친구가 한마디 한다. "너 숨소리가 이상한데?"



그리고 바로 그날밤부터 기침이 심해 누워서 잠을 못 자고 앉아서 자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 지병인 기관지 천식이 도진 것이다. 

나는 알레르기 지병 환자인데 가끔 가다 알레르기가 심하거나, 감기를 앓고 나면 천식이 도진다. 그래서 감기를 빨리 낫게 하려고 평소엔 잘 안 먹는 약도 먹고, 아침 이른 시간에 추운 공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 애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도 남편에게 부탁하고, 생강이며 계피며 좋다는 것은 다 넣고 끓여서 마시고 온갖 유난을 부렸으나... 이미 늦은 것. 



늘 그렇지만 러너는 한번 부상을 당하면 아픈 것보다 불안감 때문에 앓는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모한 행동을 하는데 예를 들면 무릎이 아파서 달리기를 쉬어야 하는 상황인데 '오늘은 괜찮을지도 몰라' 하며 달리러 나가는 행동이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달리기를 너무 오랫동안 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렇다. 특히나 대회를 앞두고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기침 때문에 등을 대고 누워서 잠도 못 자는 사람이 달리기를 하겠다고 뛰쳐나가는 일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숨이 차서 뛰지를 못한다. 이 사람이 지난주에 20마일을 뛴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단 1~2마일만으로도 숨이 턱끝까지 차서 죽을 것만 같다. 당연히 페이스도 원래처럼 나오지도 않는다. 



장거리를 뛰었을 때 내 몸에 나타나는 현상(어지러움, 두통, 온갖 통증)도 공포였지만, 겨우 이 정도의 거리에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경험도 엄청난 공포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대회날은 착착 다가오고 있다. 



이번 마라톤을 뛰기 위해 16주의 훈련을 소화하면서 나는 여러 번 아팠다. 물리적으로 고관절이 아프기도 했고, 대회를 뛰고 발바닥에 생긴 물집이 그 후로 계속되는 훈련량 때문에 아물지 못해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체력적으로 부쳐서 일상생활이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 모든 걸 넘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대회가 코앞인데 기침이 나온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나온다. 고작 3마일을 뛰는데 두 번은 멈춰서 쉬어야 할 만큼 힘들다.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훈련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서 이제는 장거리를 뛰지도 않고, 스피드 훈련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망의 대회 일주일 전,
라스트 10마일

뉴욕시티 마라톤을 일주일 앞둔 마지막 토요일에는 맨해튼이 붐빈다. 크고 작은 로컬 클럽들이 [라스트 10마일]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훈련을 한다. 이 라스트 10마일은 실제 뉴욕시티 마라톤 코스의 마지막 10마일을 그대로 따라 뛰고, 실제로 피니쉬라인이 설치되는 그 지점까지 뛰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뉴욕시티 마라톤은 초반 하프는 지형이 평이한 데에 비해 후반 하프가 경사가 심하고, 특히 마지막 1km가 급경사 오르막이다. 대회 전 마지막으로 "뛰는"날이다. 내가 문제없이 10마일을 뛸 수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여전히 기침이 심했고, 너무 불안감이 심해서 의사에게 특별히 '요청'하기까지 한 흡입치료기는 처방전이 넘어오지 않아 약국에 묶여있는 상태로 토요일을 맞이해 버렸다. (미국 의료 서비스 사정이야 한숨밖에 안 나오니 설명할 필요도 없고) 



시판 기침약 중 가장 센 것을 사서 입에 물고, 올해 내 뉴욕시티 마라톤 목표 페이스였던 9'30"/마일을 포기하고 10'00"/마일 그룹에 줄을 섰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10마일이었다. 

작년 11월에 9번째 대회를 뛰고 참가권을 확보하던 날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평생에 한 번은 뛰어보자, 기록은 필요 없다 완주만이라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마라톤.

막상 훈련을 시작해 보니 힘들기도 했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뿌듯함이 더 컸다. 평생 운동을 안 해본 내가 1분을 뛰고, 그게 30분이 되고 10km가 되고 하프 마라톤이 된 지난 3년.

'이게 되네'하는 의아함이 "해낼 거야!" 하는 투지로 바뀌어간 시간들. 지난 3년간 내가 뛰어온 거리 3,200km, '완주만 하면 된다'에서 "4시간 이내 피니쉬"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확신이 손에 잡힐 듯 눈앞까지 온 그 순간.

그리고 부상, 처음 겪는 장거리에 대한 공포, 지병 천식.... 




기록에 욕심이 많이 났던 것 같다. 평소 하던 훈련에서 조금만 더 하면 3시간대 기록이 가능할 것 같았다. 정말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마음에 더 자주 다쳤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마라톤의 의미를, 내가 왜 마라톤을 시작했는지를 되새겨보는 귀한 1시간 38분 10마일의 여정이었다. 




3시간 59분은 대단하고

4시간 1분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가...

3시간 57분에 비하면 3시간 59분도 2분 늦은 건데...




겸손함을 되찾자. 



마라톤은 그 한 번의 레이스를 어떻게 뛰었는지가 아니라, 

출발선까지 가기 위한 모든 과정을 합쳐 마라톤이라고 하는 거라고 누누이 써왔지 않았던가. 




팀 코치가 보낸 메일에 Hay is in the barn이라는 미국 속담이 쓰여있었다. 아마도 우리말로 하면 "주사위는 던져졌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훈련은 끝났고, 지나간 시간은 바꿀 수 없다. 

16주 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려왔다. 

내가 해온 노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부상과 천식으로 대회 당일에 좋은 기록을 내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달려온 지난 3년의 노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남은 것은 대회날을 즐기는 것뿐.



라스트 10마일을 뛰고 센트럴파크 72번가, 뉴욕시티 마라톤 피니쉬라인이 세월질 바로 그 지점을 통과하면서 나지막이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다음 주에, 다시 여기로 올 거야. 42.195km를 달려서"





건강히, 무사히, 즐겁게

완주하고 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평생 운동치 몸치로 살아온 여자의

인생 첫 마라톤 도전기 [인생에서 한 번은 뉴욕마라톤을 뛰자] 매거진에서 만나보세요 :)

https://brunch.co.kr/magazine/ny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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