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운동을 안 하고 살았는데, 이번생은 꿀 좀 빨겠구나 했던 내 심장이 어느 날 열일을 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시작한 달리기, 어쩌다 보니 완주한 10K 대회, 어쩌다 보니 세 번이나 뛴 하프마라톤... 그리고 "마라톤"이라는, 나에겐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꿈에 도전하게 된 지난 3년.
"어쩌다"시작한 나에게는 과분하게도 마침 살고 있는 곳이 뉴욕이다 보니 그 이름도 웅장한 월드 메이저 마라톤 중 하나인 뉴욕 마라톤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유모차 밀고 가서 그네나 좀 밀어주고 오는 곳이었던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파크를 100미터, 200미터... 그렇게 달려 드디어 뉴욕시티 마라톤의 출발지점까지 왔다.
"once in a life time"이 "the first of many"가 된 그 뜨거웠던 하루의 기록이다.
뉴욕마라톤은 대회 규모가 크다 보니 일단 5만 명이 넘는 러너들을 "출발"시키는 데만도 몇 시간이나 걸린다. 출발지점인 스태튼 아일랜드는 평소 거주자가 아니면 갈 일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곳이지만 이날만큼은 그 섬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녹록지 않을 만큼 붐빈다.
삼엄하게 설정된 시큐리티 때문에 여러 번 검문을 하고 나서야 겨우 스태튼 아일랜드에 발을 디딘다. 이 날 참가자는 맨해튼에서 출발하는 특별편성 페리를 타고 스태튼아일랜드로 가거나, 버스를 타고 베라자노 브리지를 건너 섬으로 들어간다. 이 다리는 마라톤 코스의 시작점이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교통은 폐쇄되기 때문에 새벽 일찍 섬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우리 런클럽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새벽 5시 30분에 스태튼 아일랜드로 향했다.
여러 번 뉴욕마라톤을 뛰어본 친구들 말로는 대회를 앞둔 긴장감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대회 전날엔 잠을 거의 못 자니 마지막 일주일은 틈 나는 대로 잠을 많이 자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마지막 일주일 동안 아주 잘 잤고 대회 전날도 소위 꿀잠을 잤다. 4시에 맞춰둔 알람에 눈을 떠 다시 한번 짐과 복장을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소지할 물건도 꼼꼼히 챙겼다.
뉴욕 마라톤 일반 참가자는 피니쉬라인에서 픽업할 가방을 대회 전날까지 미리 주최 측에 맡겨야 하는데 나는 런클럽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대회날 아침에 팀 멤버들이 가방을 맡아 피니쉬라인까지 가져다주었다. 이 가방에는 대회 후 갈아입을 옷과 물티슈, 렌즈통과 안경, 작은 안마도구 등을 챙겼고 크록스도 챙겼다. 대회 후에는 발이 부어서 러닝슈즈를 한번 벗으면 다시 신기 어려울 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출발지점까지 가져갈 물건은 주최 측이 미리 주는 규격 비닐봉지에만 담을 수 있다. 출발지점에 가지고 간 물건은 출발 전에 모두 버리던지, 아니면 몸에 소지하고 달려야 한다. 한번 출발구역으로 들어가면 물건을 다시 밖으로 보낼 방법이 없다.
보통은 대회 전에 먹을 간단한 음식과 보온을 위한 겉옷, 선크림 같은 것을 챙기면 된다. 물론 보온을 위한 겉옷도 입고 달릴 것이 아니라면 출발구역에 두고 나와야 한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인 우리의 축제날인데 새벽 5시 반에 버스를 타러 가니 온갖 후줄근한 복장을 한 친구들이 가득하다. 출발그룹에 따라서는 출발 전 대기시간이 5시간에 이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겉옷을 입어야 한다. 대회당일은 새벽엔 쌀쌀했지만 10시 이후에 기온이 15도 전후까지 오르는, 마라톤 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기 때문에 보통은 반바지에 짧은 소매 옷을 입고 겉에는 낡은 코트나 셔츠를 여러 겹 입는다. 샤워가운을 입고 온 사람들이 많아서 좀 재미있었다.
나는 몇 년 동안 핼러윈 때 입었던 상어 코스츔을 입었다. 나름 플리스 재질인 데다 우주복 타입이라 따뜻하고 좋았지만 대기구역에서 이목을 끄는 ;; 문제가 있었다. 입고 간 옷은 출발 직전에 행사장 곳곳에 있는 의류수거함에 넣으면 자원봉사자들이 수거해 재활용된다.
일반부 1조는 9시 10분에 출발하는데 비해 나는 3조 10시 20분이라서 시간이 여유로웠다. 행사장에는 테라피 독들이 나와있는데 거기서 사심을 채우고 마음의 안정도 찾았다.
음식은 자기가 가져간 음식을 위주로 먹지만 뉴욕마라톤 나름의 명물인 던킨도너츠가 나와서 따뜻한 커피와 차를 나눠준다. 살면서 던킨도너츠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따뜻한 음료가 절실한 아침이었다. 2023 뉴욕마라톤이라는 글자가 박힌 모자도 나눠주는데, 앞에도 썼듯이 여기서부터 무슨 물건을 가지고 나가려면 몸에 지니고 뛰는 수밖에 없다. 날씨가 모자를 쓸 만큼 춥지도 않았고, 몸에 뭘 지니고 뛰기도 싫어서 모자는 받지 않았지만 그 모자가 나름 인기가 많은 모자라고 다들 하나씩 받았다.
출발지점인 베라자노 브리지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출발시각이 다가온다. "마라톤 대회를 가면 사람들이 다 누워있다"는 글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진짜로 다들 누워있었다. 나는 찬 바닥에 누우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앉아있었는데 다음엔 담요 같은 것을 가져가서라도 누워있어야겠다고 절실히 생각했다. 출발 전에는 무조건 에너지를 안 쓰는 게 상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출발 전에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이동식 화장실이 정말 많이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나 줄이 정말 길었다. 한 30분 정도를 줄에서 기다렸던 것 같다. 넉넉히 시간을 잡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마지막 출발 준비를 했다.
뉴욕마라톤의 출발지점은 베라자노 브리지의 스태튼아일랜드 쪽 끝단이다. 출발하자마자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으로 들어온다. 출발지점이 다리 위다 보니 모든 참가자는 3가지 색깔로 출발위치가 나뉜다. 베라자노 브리지는 2층으로 된 다리라서 출발그룹 컬러 핑크는 1층(로워덱)에서 출발, 오렌지는 2층(어퍼덱) 좌측차선, 블루는 중앙분리대를 넘어 2층 우측차선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대회 규모에 비해 출발선이 다소 아담하다.
출발그룹은 1조에서 5조까지 시간이 나누어져 있다. 가장 먼저 출발하는 1조는 9시 10분, 내가 속한 3조는 10시 20분 출발이었다. 이 출발조는 다시 한번 속도별로 그룹을 나눠 6개의 알파벳으로 나뉘어 지정된 대기구역에서 대기하다 출발시간이 다가오면 스타트라인으로 이동한다.
지정 대기구역에서 마지막으로 물이나 젤을 먹고 마지막으로 소지한 물건을 전부 버린 다음 A그룹부터 실제 스타트라인을 향해 이동한다. 베라자노 브리지가 자동차 전용 다리다 보니 크로바턴으로 다리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거리도 나름 꽤 됐다. 운 좋게 A그룹이었기 때문에 맨 앞에서 유도해 주는 미군을 따라 다리 위로 올라갔다. 크로바턴을 크게 돌아 저 앞에 스타트라인이 보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많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첫 피니쉬 후에 울었는데 나는 끝나고는 울지 않았지만 시작 전에 많이 울었다. 내 인생에 없을 것만 같았던 일이 내 눈앞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열심히 달려온 3,200km의 결실이라는 생각에 정말 많이 감사했고 감동했고, 그리고 벅차올랐다. 저 출발선을 통과해 내 앞에 펼쳐질 인생 최초의 도전에 정말 많이 설렜다.
이 대회의 참가권을 따기 위해 작년 1년 동안 대회를 9번 뛰고 자원봉사를 1번 했다. 대회를 가면 늘 있는 그 아나운서의 익숙한 목소리가 우리를 향해 "렛츠고"라고 외친다. 늘 울려 퍼지던 뿔피리가 아닌 공포탄 총소리를 들으며 출발했다.
내가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내가 지금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평생 운동치 몸치로 살아온 여자의
인생 첫 마라톤 도전기 [인생에서 한 번은 뉴욕마라톤을 뛰자] 매거진에서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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