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전에 후퇴는 없다
쇼기 판의 가장 구석,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말이 있다. 화려하게 사방을 누비지는 못하지만, 한번 길이 열리면 누구보다 빠르게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말. 바로 향차(香車)다. 입문자들은 흔히 "그냥 앞으로만 가는 말 아닌가?"라며 가볍게 여기기 쉽지만, 고수들의 대국에서 향차는 승패를 가르는 날카로운 창이 되기도 한다. 이 우직한 창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 전략과 미학을 살펴본다.
향차의 움직임은 아주 간결하다. "앞으로 원하는 만큼 전진".
체스의 룩(Rook)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은 좌우나 뒤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진: 가로막는 말이 없다면 판의 끝까지라도 한 번에 달려갈 수 있다.
후진 불가: 한 번 앞으로 나아가면, 승급(나리)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 뒤로 돌아올 수 없다.
"향차는 배수진을 친 장수와 같다. 전진은 있어도 후퇴는 없다."
향차를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전략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 전술을 기억해야 한다.
① 끝 공격
향차는 쇼기 판의 양 끝(1열과 9열)에 배치되어 있다. 상대방의 왕이 구석으로 도망갔을 때, 혹은 상대 진형의 빈틈을 만들 때 가장 유용한 것이 바로 이 '끝 공격'이다. 보병(步兵)을 먼저 희생시켜 길을 열고, 그 뒤에서 향차가 달려나가 상대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전법은 쇼기의 기본이자 필살기다.
② 원거리 저격
향차의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멀리서 적을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압박을 받는다.
특히 일직선상에 두 개의 기물을 동시에 위협하는 경우, 앞의 말이 피하면 뒤에 있는 더 중요한 말(비차나 각행 등)이 잡히게 된다.
③ 가진 말(모치고마)로서의 위력
쇼기의 묘미는 잡은 말을 내 편으로 다시 쓰는 데 있다. 향차를 손에 들고 있다가, 좁은 틈새에 뚝 떨어져서 왕이나 비차를 노릴 수 있다.
강력한 직진 본능은 곧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 너무 깊숙이 적진으로 들어갔는데 승급하지 못하거나 길이 막히면, 그 향차는 '죽은 말'이나 다름없다. 상대방은 그저 그 향차를 무시하거나 나중에 천천히 잡아먹으면 그만이다.
보병 앞에 무력하다: 향차의 머리 바로 앞에 상대가 보병(步兵)을 툭 떨어뜨리면, 향차는 꼼짝없이 막히게 된다. 향차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수비법이다.
적진(상대방 진영 3줄 이내)에 들어가거나, 적진 안에서 움직일 때 향차는 '성향(成香, 나리쿄)'으로 승급할 수 있다.
이때부터는 금장(金將)과 똑같은 움직임을 갖게 된다.
장점: 이제 뒤로 갈 수 있다. 전후좌우를 커버하며 왕을 수비하거나 상대를 압박하는 강력한 기물이 된다.
전략: 적진 깊숙이 박힌 향차는 반드시 승급하여 그곳을 휘젓고 다녀야 제 몫을 다한 것이다.
입문 시절에는 중앙 싸움에 몰두하느라 구석의 향차를 잊기 쉽지만, 고수일수록 이 '구석의 창'을 예리하게 다듬는다. 당장 실전에서 틈날 때 향차 앞의 보병을 한 칸 올려(하시후) 공격로를 미리 확보하고, 손에 넣은 향차는 주저 없이 상대 중요 기물의 머리 바로 앞에 떨어뜨려 진형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시도해 보자. 화려한 비차나 각행이 꼼짝 못 할 때 꽉 막힌 대국의 혈을 뚫어주는 결정타는, 언제나 우직하게 전진하는 향차의 몫임을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