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게 되는 사람들

'팩트' 중독 사회

by 민기

나는 인생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보냈다.
어릴 적 필리핀과 호주를 거쳐, 지금은 상하이의 한 대학교에서 졸업을 앞두고 있다.
낯선 나라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늘 한국이 그리웠다.
한국 음식, 서울의 도시 냄새, 소주의 맛.
그냥 고향이 그리웠던 걸까?

실은 내가 그리워했던 건 '한국적인 것'이었다.
한국의 따뜻함, 치열한 서사, 서로에게 관심 많고 정 많은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무언가.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것도 함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성공의 기준은 역치가 높다.

또, '평범'의 기준도 그다지 평범하지 않다.
어릴 적부터 나는 이렇게 배웠다.
경제적으로 무시받지 않으려면, 학력으로 무시받지 않으려면, 외모로 무시받지 않으려면
열등하지 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그래서 원하지 않아도,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늘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학창 시절은 사회에서 ‘평균 이상’의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 같았다.
다양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고 싶더라도,
아이러니하게도 '열등하지 않아야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탓이나 하는 실패자로 비칠까 두려웠다.


이런 사회에서는 ‘팩트’라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된다.
팩트에 집착하는 태도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잣대에 들지 못하는 순간, 낙오자가 되고 만다.
또, 맥락과 과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고, 방향을 잃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을 지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남들보다 앞서 있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고 조급한 사람들이 많다.

고된 현실 속에서도 행복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 재빠르게 흘러가는 사회의 박자에서도 나만의 속도와 페이스를 찾아야 한다. 냉소적인 태도는 때로는 해답을 제시해 주고 방향을 알려주지만, 그 판단은 반대쪽의 적은 가능성이라는 것을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라는 것은 작은 확률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재미있는 것이다. 매사에 냉소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내가 꿈꾸는, 내가 그리는 세상으로 멀리 도약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팩트와 비교에만 얽매이지 않고,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태도.
그것이 결국, 숨지 않고 살아가는 법이고
삶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

조금 늦어도, 방향이 달라도, 그 속에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이 사회가, 비교 대신, 자기만의 가능성과 방향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숨지 않게 해주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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