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만 그런게 아니다 | #2
지금의 플랫폼 공룡들이 2004년~2006년 사이에 처음 만들어졌으니, 대략 15년 만에 사람들은 플랫폼 없이는 하루도 보내지 못하게 됐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업은, 대중이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공간을 주축으로 업의 중심이 점차 옮겨간다. 굳이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그 전부터 이미 SNS 플랫폼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었다. 케이블TV 방송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도깨비, 미스터션샤인 등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케이블이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5년 전부터도 디지털 콘텐츠 부서는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
소비자들이 SNS 플랫폼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울 게 없다. 특히 청소년과 젊은 세대의 SNS 중독은 수많은 의학, 심리학 학술지에서 다룰 정도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 되었으며, 이제는 해결책을 모색하고 논의하는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방송사 등 제작자, 공급자들이 콘텐츠를 내보내며 서서히 플랫폼에 중독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문제 인식의 차원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플랫폼은 기본적으로 공급자와 소비자의 매개자이다. 플랫폼이 소비자의 인지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알고리즘 및 프로덕트 설계를 하면, 그 플랫폼에 공급자가 만들어서 태운 콘텐츠가 소비자에게 도달하면서 메시지의 공유와 확산이 이루어진다. 플랫폼에 중독된 공급자가 내보내는 콘텐츠는 윤리의 체로 거르지 않은 날 것의 콘텐츠다.
공급자가 플랫폼에 중독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TV와 달리 유튜브, 페이스북이 공급자 입장에서 흥미로울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전수의 데이터에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TV 시청률은 보통 아리아나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시청 연령과 주요 시청 시간대 등을 분석하지만, 이는 닐슨이라는 회사가 셋톱박스를 설치한 아주 일부 가정집에서 전송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출한 것이다. 그에 반에 유튜브 스튜디오는 조회수 전량에 대한 시청시간과 검색어 순위, 심지어 기기 종류와 구독이 발생한 경로까지 투명하게 안내한다. 비유하자면, 유튜브는 데이터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콘텐츠 데이터에 대한 윤곽선이 뚜렷하다.
처음 데이터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기분을 느꼈을 때는 키스신 클립에 대한 데이터를 들여다볼 때였다. 드라마 키스신 영상 약 50여개의 누적 조회수가 몇 천 만이 넘어가고 있었다. '키스신' 검색어를 종종 입력해서 영상을 본다는 친구의 간증을 접하고 연관 검색어로 드라마 키스신 정도를 예상하면서 검색어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실제 검색어에는 내가 예상한 것 뿐 아니라 '키스 혀', '키스 드라마 침대', '야한 키스', 그리고 여기에 작성하면 검열될 것 같은 단어들도 있었다. 검색을 통한 조회의 비중이 약 1%대라고 해도 최소 몇 십 만 명은 이런 단어를 유튜브 창에 직접 친다는 로직이 완성된다.
2021년에 개설된 스타골프빅리그는 4050 남성층이 주로 시청하는 골프 채널이다. 신규 콘텐츠가 올라올 때마다 아버지는 TV에서 유튜브를 틀고 스타골프빅리그를 찾아서 큰 화면으로 50분짜리 콘텐츠를 감상했다. 유튜브 스튜디오에서 제공한 기기 유형 데이터에 따르면, TV나 데스크탑을 통해 시청하는 비율이 다른 유튜브 채널 대비 몇 배나 비율이 높다. 이렇게 유튜브 스튜디오를 켜놓고 데이터를 보고 있으면,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린다. 더욱 위험하게도, 숫자의 바다 속에서 건져올린 정보를 쥐고 있으면 마치 사람들의 콘텐츠 소비 행동을 지도와 같이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흡사 읽히는 듯한 상태가 나는 공급자의 플랫폼 중독이라고 생각한다.
데이터가 투명하기 때문에, 공급자들은 더욱 의심 없이 중독된다. 사람들이 키스신 클립을 찾아볼 때 입력하는 검색어도 모두 사실이고, 스타골프빅리그 채널의 TV 미러링 시청 비율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숫자가 가지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특성이 윤리성마저 담보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이 지점이 바로 공급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한마디로 데이터 맹신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하는 것과, 모든 일의 최우선 기준을 데이터에 두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결과를 초래하지만, 데이터라는 칼자루를 쥔 쪽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후자 쪽으로 치우치기 쉽게 된다.
최근 페이스북 내부 폭로자 프랜시스 호건은 상원 청문회에서 페이스북 경영진의 비윤리성에 대한 소명을 했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이 가짜뉴스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콘텐츠를 확산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을 경영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더 돈이 되기 때문에 무대응 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접하며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다. 작년 쯤 팀 내에서 실험적인 데이터 분석을 하던 중, 좋아요 보다 싫어요 비율이 더 높은 영상이 평균적으로 노출과 조회수가 높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때, 나는 잠깐이나마 싫어요가 더 많을 것 같은 콘텐츠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금방 생각을 접었지만, 혹시나 스스로 윤리적 제약을 걸지 않은 채 그런 콘텐츠를 골라서 플랫폼에 태웠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싫어요가 많은 콘텐츠가 더 높은 수치를 가져다준다고 해서, 그것이 더 윤리적이라는 얘기는 절대 될 수 없다.
데이터라는 칼자루를 한 손에 쥔 공급자들은, 다른 손에는 윤리성이라는 방패를 들고 있어야 한다. 윤리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콘텐츠를 만들자는 소리가 아니다. 어차피 그런 콘텐츠가 데이터적으로 유의미 하지 않다는 건 콘텐츠 공급라면 알고 있다. 하지만 악플이 달리면서 댓망진창이 되는 콘텐츠가 노출이 잘 되고 조회수가 잘 뽑힌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걸 토대로 콘텐츠의 방향성을 잡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 때 바로 공급자로서의 중독을 의심해야 한다.
콘텐츠 공급자의 플랫폼 중독 고찰
#1 콘텐츠를 플랫폼에 올리는 일을 하는가? https://brunch.co.kr/@mrtolstol/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