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회사 직원의 관전평
이번주 목요일, 모두가 유튜브를 보느라 회사 전체가 조용했다. 동료 한 명은 기자회견에 도파민이 너무 샘솟아서 업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날 저녁, 하이브에 유리하던 여론도 뒤집혔고,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입고 나온 모자와 티셔츠는 완판됐다. KBS의 한 기자는 “기존의 기업 홍보 전략을 모두 수정해야 할만큼 힙했”다며 민희진의 기자회견을 평했다. 날 것 같은 도파민의 결정체였지만, 대중을 상대로 한 촘촘히 계산된 전략이 있었던 민희진의 2시간 44분짜리 기자회견. 그 것을 면밀히 해부해보자.
(1) 세계관을 촘촘히 짜라 - 개저씨 상사에 핍박 받는 K-직장인의 억울함
민희진은 SM과 하이브를 거쳐온 아트 디렉터다. 엔터 회사에서 아트 디렉터란 아티스트가 대중에 어떻게 보여질지 비주얼 컨셉을 정하고, 나아가 아티스트가 딜리버할 궁극적인 세계관을 만드는 사람이다. 드라마로 비유하면 대본을 쓰는 작가와 그것을 구현하는 감독의 역할도 일부 수행하는 것이다. 민희진의 이번 기자회견도 ‘열심히 일한 K-직장인의 억울함’이라는 명확하게 설정된 세계관 하에서 진행되었고, 그의 후줄근한 의상부터 욕설 섞인 비판, 뉴진스 생각에 터져나오는 울음까지 모두 그 세계관을 성실하게 뒷받침했다.
기자회견 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민희진에 대한 공감 여론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는데, 이는 민희진이 자신의 상황을 저연차 직장인들이 공감할 수 있게 프레이밍 했기 때문이다. 김원장 KBS 기자의 페이스북에 의하면 “거대 기업 자본 對 열심히 기업을 일군 경영자” 프레임, “술 마시고 골프나 치는 개저씨 보스 對 빡치게 일만 해온 억울한 직원” 프레임을 걸었다고 한다. 실제로 트위터를 중심으로 민희진의 개저씨론이 퍼지면서 자신이 겪은 개저씨 썰을 풀거나 민희진을 보며 개저씨에게 지지 않겠다며 마음을 다잡는 트윗들이 올라왔다.
하이브의 반박문을 살펴보면, 민희진 대표가 “특유의 굴절된 해석 기제로 왜곡된 사실 관계를 공적인 장소에서 발표”했다고 한다. '특유의 굴절된 해석 기제'는 다시 말하면 세계관 중심의 사고를 한다는 소리다. 민희진은 방시혁 혹은 하이브 CEO와 직접 나눈 카톡, 어도어 이사진과의 대화, 작년부터 이어진 법적 공방 등을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관 아래 집어넣어 재해석했을 것이다. 기자회견을 지켜보며 평생 무형의 세계관을 만들고 그것을 비주얼라이징 해온 사람의 짬바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엄숙한 기자회견장에서, 그것도 생방송으로 세계관을 실시간으로 구현하는 느낌이었달까.
(2) 비주얼을 메시지로 써라 - 온몸으로 나타낸 뉴진스맘의 정체성
SM과 하이브를 거쳐온 민희진의 미감은 세련되었지만, 편안하고 직관적인 걸 추구한다. 소녀시대가 GEE로 활동할 때 스키니진을 입혀 국민여동생으로 만든 것도 그고, 엑소가 으르렁으로 컴백했을 때 전원 교복을 입혀 짐승 연하남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도 그다.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되, 난해하지 않고 직관적인 그의 미감은 뉴진스에서 정점을 이루는데, 기자회견장에서 박찬호 모자와 스트라이프 맨투맨을 걸치고 쌩얼로 입장한 그를 보고 깨달았다. 뉴진스가 민희진이고, 민희진이 뉴진스다.
기자회견 전까지, 민희진은 하이브의 후광을 입고도 뒷통수를 치려고 한 빌런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와 쌩얼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왔고, 2시간 44분 후 여론은 그녀의 편으로 돌아섰다. 소위 말하는 피해자다움을 비주얼화한듯, 민희진은 ‘하이브가 나를 악마화하는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나머지 옷매무새를 만질 시간도, 메이크업을 하고 올 시간도 없었다’는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대중에 전달했다. 박근혜 탄핵 심판날, 기자회견장을 들어선 이정미 대법관이 머리 뒤에 말아놓았던 헤어롤을 깜빡한 나머지 현장의 긴박함이 고스란히 연출되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민희진은 머리와 메이크업을 할 시간에 뉴진스의 이번 컴백에서 멤버 민지의 의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에 집중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머리 끝까지 뉴진스 맘인 민희진이 신곡 홍보를 위해 민지의 의상을 입고 온 것이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반대로 민지가 민희진 룩을 입은 것이다. 정확히는 민희진이 민지에게 자신이 입는 '민희진 룩'을 입힌 것이다. “우리 민지는 어릴 때부터 예뻤고 혜인이는 기사 뜨고 나보다 더 울었다”고 할만큼 뉴진스와 민희진은 끈끈한 관계인데, 그에 더해 사실상 뉴진스는 민희진의 페르소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보라색 모자와 초록색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바로 ‘뉴진스맘’으로서 민희진의 두번째 기자회견 전략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조금 과장하면, "나 없이는 지금의 뉴진스도 없다"는 메시지랄까.
딜리버리는 쉽고 재밌게 하라 - “맞다이로 들어와” “개저씨들
”
대중의 주목도를 높이는 것은 그가 천부적으로 가진 능력인 것 같다. 콘텐츠나 엔터 회사는 실제로 업무 환경에서도 욕설이 제법 많은 편이기 때문에, 개새끼 소새끼하는 거친 발언을 새롭게 연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SM과 하이브 직원들의 후기를 들어보면 기자회견의 모습이 평소 그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래도 성공한 기자회견의 선배격인 나훈아, 박준형조차 회견장에서 직접적으로 욕설을 입에 담지는 않았는데, 예상키로 민희진 대표도 그렇게까지는 할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대중을 상대하는 콘텐츠업에 종사한 사람의 특성상, (1) 쉬운 내용을 (2) 재밌게 보여줘야 사람들이 집중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욕지거리에 빵 터지는 기자들을 보며 이 방향에 확신을 갖고 밀어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그는 2시간 44분간 동안 무수히 많은 어록과 그 이후 SNS상에서 각종 2차 저작과 패러디를 촉발시키며 바이럴 전쟁에서 승리했다. 크리에이터들은 바로 그의 의상을 따라 입으며 그를 패러디하고, 유튜버들은 그의 연설 장면에 힙합 비트를 깔아 리메이크 영상을 만들며 그를 '국힙원탑'으로 숭배한다. 여론전을 앞둔 사람들이 민희진의 기자회견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https://www.youtube.com/watch?v=4gIIInvqT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