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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하 Nov 07. 2021

할머니를 보내고

우주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나의 가장 첫 기억이 언제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걷던 마포구 신수동의 골목. 나에게 한없이 정겹고 따뜻한 그 거리를 할머니와 손잡고 걸었다. 왜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기억은 나에게 오래도록 진한 향기로 남아있다. 이따금 그 장면이 꿈에 나올 때가 있는데, 나는 그때마다 네 살짜리 아이가 된다.


그때의 할머니 손은 주름지지 않았고, 걸음은 당당했으며, 목소리는 누구보다 명랑했다. 곗날이면 동네 할머니들과 한참을 떠들던 할머니의 웃음, 나는 할머니가 웃으면 같이 웃었고, 울 때면 나도 슬퍼져이유도 모른 채 엉엉 울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첫 어른이자,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내 고향집의 창문. 어릴 때, 이곳에서 할머니와 까치집을 구경하곤 했다.

무한한 사랑이란 뭘까. 할머니가 나에게 쏟은 마음을 표현하자면, 그것과 가까웠으리라. 어려서부터 먹이고 씻기며, 뭐 하나 할머니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침에는 싸구려 식용유에 계란을 부쳐 일일이 떠먹여 주시고, 하굣길에는 맛있는 과일과 간식이 나를 기다렸다. 우스갯소리로 손자 손녀들의 "할머니 배고파요"라는 말은 할머니에게 손주들이 아사 직전에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이 들린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도 그랬던 걸까. 배고프다는 말이 나올 수 없을 만큼 많이 먹이셨다. 그때 배부르다고 마다했던 음식을 지금 한 끼라도 먹을 수 있다면,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의 어릴 적 사진을 본다.

흑백 사진에는, 교과서에나 봤을 법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 보인다. 추억을 들여다볼 때,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을 기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할머니가 살던 마을은 정말 오지 마을의 풍경 그 자체였다. 흙밭에 지어진 초가집 앞으로 마을 사람들 여럿이 카메라를 보고 있다. 억척스럽게도 사셨겠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날은, 내가 취업 면접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얼마 되지 않여름날이었다. 할머니 손자 이제 다 컸다며 이제 손자 걱정하지 말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셨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던 '화이팅'은 지금 떠올려 봐도 참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는 10년 넘게 파킨슨 병을 앓아 오셨다. 제멋대로 떨리는 근육들 때문에 말하기도 음식을 먹기도 많이 불편해하셨다. 걷는 것이 불편해지고, 지팡이를 짚기 시작하셨고, 몇 년 전부터는 휠체어에 의지해서만 이동이 가능하셨다. 할머니 구부정한 뒷모습을 떠올려 보면, 참 가슴이 아리다. 내가 매달려 있던 세월을 지나 당신의 몸이 그렇게 구부러졌는데도, 할머니는 나를 보며 많이 웃어주셨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나의 삼시세끼, 할머니의 고난길

할머니는 후라이드 치킨을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할머니 삼우제 상 위에는 통닭이 올라갔다. 치킨을 먹으며 목이 참 많이 메었다. 손자 첫 월급으로 추석에는 꼭 용돈 드리겠다 한 약속이 끝내는 지켜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실천 없는 다짐의, 시간 앞의 건방짐의, 그리고 소중한 것들의 유한현실을 깨닫는다. 평생을 받고 살다가, 나는 영영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였다. 할머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너무 야위셨다. 할머니가 침대에 힘 없이 누워계신 모습은 결국 그녀의 쓸쓸한 죽음에 대한 암시였다. 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신수동 집에 찾아갔을 때, 그곳은 놀랍도록 그대로였다. 초등학교 4학년 어버이날에 써드린 편지, 종이를 구겨 만든 카네이션, 나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 달라진 것은, 할머니가 있어야 할 자리에, 너무나도 굳은 표정의 할머니 영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전에 다니시던 양로원에서 찍어준 사진이란다. 몸이 굳어,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는 할머니는 외로운 계절의 변화를 꿋꿋이 버티고 계셨다.


할머니, 할머니. 이제는 불러도 대답이 없지만 나는 가끔 대답을 듣는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위로가 된다. 며칠 전에는 집 앞 공원에서 단풍이 너무 예뻐 눈물이 났다. 햇살이 따뜻해서, 할머니가 나를 보고 있구나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웃으면 할머니도 마음이 더 편하시겠지.


낡은 솥이 돌아가고, 나는 안방 바닥에 앉아 티비를 본다. 할머니의 마음이 담긴 조기찌개가 끓는다. 비릿한 밥 냄새에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니의 손은 분주하기만 하다. 나는 그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며 웃고 울 나이를 먹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꾸민 할머니를 떠올릴 때, 나는 정말이지, 자꾸 울지 않을 수 없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을 누군가에게,

고인은 당신의 죽음을 슬퍼할 가족이 있음에 감사할 것이고, 그럼에도 남은 가족들이 조금 덜 아프고 덜 슬퍼하기를 바랄 것이다. 여러분의 삶이 힘든 순간에 있을 때 떠올리는 고인과의 기억이 따뜻하고 행복한 것이기를. 또, 그것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 애틋한 보물처럼 오래도록 빛나기를. 나와 할머니의 기억이 그런 것처럼.



파스텔 톤의 아파트가 노을을 받아서 참 아름다운데,

끝내 올해 가을을 넘기지 못한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나무와 깔을 맞춘 사람들의 모습이 멋진 계절에, 빨간 낙엽이 진다.

할머니. 할머니 손자랑 단풍놀이 가자. 휠체어는 내가 밀어줄게요.

느긋한 걸음으로 고향까지 가자. 내 손 잡고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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