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누군가의 빈자리와 함께 사는 법

Azam Mahdavi의 그림책 : Empty and Me

by 정수진


어렸을 때는 어른들은 모든 일에 참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 같았습니다. 숙제를 깜빡 잊고 안 했을 때, 무심코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을 때, 늦잠을 자서 학교에 늦을 것 같은 사소한 실수의 순간에도 언제나 허둥지둥 대던 제게는 그 침착함은 나이와 함께 오는 선물같이 보였지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누군가를 잃은 순간에도 손님을 맞고,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어른들의 모습은 나이가 들면 당연히 갖게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잃는 경험을 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잃은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엄마였지요. 30대가 된, 누구라도 어른이라고 부를만한 나이였는데도, 엄마를 보내던 그날들은 머릿속에 부옇게 비현실적인 장면처럼 남아있습니다.


그래요. 어른이라고 해서 가까웠던 누군가를 영원히 떠나보내는 것이 쉬웠을 리 없는 것이었지요. 그저 해야 할 일들을 주어진 역할에 따라 연기하듯 해 내는 것뿐이었어요. 어쩌면 이미 성장한 어른이기에 상실을 극복하는 것이 더 어려울 지도 모르지요. 상실의 극복은 성장을 요구하니까요.


얼마 전에 친한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예기치 못하게 서둘러 가신 발걸음이라, 억지로 웃는 친구의 초췌해진 얼굴에 당황과 억울함, 분노가 배어 있었습니다. 애도의 다섯 단계가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이라고 하던가요? 하지만, 저는 이 모든 단계에 함께 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공허함(emptiness)입니다.


그리고, 여기 그 공허함을 끌어안고 사는 한 소녀가 있습니다.




This is the last picture of Mama and me
이것은 엄마와 나의 마지막 사진이고,

and the last pot we planted together.
우리가 함께 심은 마지막 화분이에요.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에게 "Empty(공허)"가 찾아옵니다. 안개에 싸인듯한 이 거대하고 반투명한 "Empty"는 잠을 잘 때도, 학교에 갈 때도, 심지어 놀이동산에 갔을 때도 소녀의 곁에 꼭 옆에 붙어 있지요.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소녀에게 Empty는 유일한 친구입니다.


Until one day,
그러던 어느 날,

the last pot mom and I planted together bloomed.
엄마와 내가 함께 심었던 마지막 화분이 꽃을 피웁니다.

I gave one of the flowers to Empty.
나는 그 꽃들 중 하나를 Empty에게 주었어요.



소녀는 엄마와 함께 심었던 마지막 화분에서 돋아난 꽃을 Empty에게 건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아기 고양이를 구하죠. 이제 고양이도 그들의 친구가 됩니다.


Empty는 여전히 소녀의 곁에 있었지만, 소녀의 닫힌 세계는 점점 세상을 향해 문을 엽니다. 꽃을 담은 Empty가 더 이상 완전히 비어있지는 않은 것처럼, 소녀의 세계 속에 어린 고양이와, 운동장에서 만난 친구와,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가 자리 잡습니다.


이제 더 이상 소녀의 세계는 비어있지 않습니다.






이 그림책의 정식 제목은 "Empty and Me: A Tale of Loss and Friendship(Empty와 나: 상실과 우정의 이야기)"입니다. 이란의 작가인 Azam Mahdavi가 쓰고, Maryam Tahmasebi가 그린 그림책으로, 2023년에 페르시아어와 영어가 병기된 버전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지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감정이 배제된 담담한 텍스트와 세피아톤의 색연필로 그린듯한 담백한 그림은 엄마를 잃고 공허 속에 잠긴 소녀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감정을 나타내는 어휘라고는 잃어버린 엄마의 자리에 찾아온 존재인 "Empty"의 이름뿐이죠.


엄마가 그랬듯, 소녀의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는 Empty는 거대한 눈물방울처럼 보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한 번도 울지 않는 소녀의 모든 눈물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사실, 이 책은 사랑하는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그 슬픔을 서서히 극복해 나가는 성장과 치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공허한 눈물방울이었던 Empty 속에 꽃이 담기고, 어린 고양이가 함께 하고,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가게 되는 과정이지요.


다만, 그 모든 과정을 Empty가 사라지지 않고 함께 한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상실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비어있는 공간을 보듬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 공간을 채웠던 사람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비어버린 자리가 주는 공허함과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또한 "우정(friendship)"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마지막(last)"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마지막으로 심은 화분...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처음(first)"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소녀가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This is the last picture of us,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사진이고,

and the first pot we planted together.
그리고 우리가 함께 심은 첫 번째 화분입니다.



모든 끝은 시작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이제 소녀의 인생도 새로운 시작점에 서게 됩니다.




오늘은 저의 엄마가 돌아가신 지 22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직 제 옆에 있는 그 "Empty"가 이제 저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을 만큼의 긴 시간이 지났네요.


엄마, 거기서 잘 계시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 사랑합니다...






그림책 번역가인 Parisa Saranj가 직접 읽어주는 audiobook

https://www.youtube.com/watch?v=aL3aq3I2x44

작가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azamm_mahdavi/

삽화가의 인터뷰: https://cannonballread.com/2023/04/empty-and-me-a-tale-of-friendship-and-loss-blackraven/

권장 연령: 4~7세 / Preschool ~ Grade 3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