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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패션이라면 역시 구겨진 종이봉투지~

Robert Munsch 그림책:The Paper Bag Princess

by 정수진


미국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제 딸은 디즈니 스타일 공주 패션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원래 핼러윈 코스튬은 귀신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도 귀신인 척하는 아일랜드 켈트족의 오랜 풍속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소녀들은 무섭고, 무엇보다도 전혀 안 예쁜 괴물이나 귀신 복장보다는 공주 복장을 선호하지요. 핼러윈마다 다양한 색상의 드레스에 블링블링한 목걸이, 귀걸이, 반짝이는 티아라를 쓴 소녀들이 학교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모습은 아주 흔한 모습이었어요.


어째서 디즈니의 여자 주인공들은 모두 공주인 것일까요? 마치 공주가 아닌 여자아이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같이 공주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그녀들. 어쩌면 공주 (또는 여왕) 정도는 되어야 인생의 중요한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는, 그 시대 여성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를 역설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착하고, 예쁘고, 우아한 공주들의 전형을 깨부수는 공주가 있습니다. 그녀도 물론 아름다운 옷과 멋진 궁전, 잘생긴 약혼자인 왕자를 갖추고 있었지요. 어느 날 못된 용이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기 전까지는요....




Elizabeth 공주는 공주다운 성에 살고, 공주다운 옷을 입고, 공주답게 왕자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지요. 하지만, 어느 날, 못된 용이 찾아와, 그녀의 성을 무너뜨리고 그녀의 옷을 다 불태우고 그녀의 약혼자인 Prince Ronald를 잡아가 버렸습니다. 화가 난 공주는 용을 쫓아가 그녀의 왕자를 찾아올 결심을 했지요.


She looked everywhere for something to wear,
그녀는 뭔가 입을만한 것을 찾아 여기저기를 찾아 헤맸지만,

but the only thing that she could find that was not burnt
불타지 않은 것은 것으로 그녀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was a paper bag.
오직 종이봉투 하나뿐이었어요.


마치 갑옷이라도 입은 양 종이봉투를 몸에 걸친 Elizabeth는 불타버린 숲과 앙상하게 뼈만 남은 말들의 잔해를 따라가 불을 뿜는 용의 거처를 찾아냅니다. 다만 용은 그날 이미 성 하나를 다 먹어치운 터라 공주를 상대도 해주지 않는군요.


포기를 모르는 공주는 기지를 발휘하여 용의 자존심을 자극합니다. 그 유명한 "너 그거 할 줄 안다던데 사실이야?" 수법에 속아 넘어간 용은 150개의 숲을 불태우고(아... 환경파괴범이여 ㅠㅠ) 쾌속으로 세상을 두 바퀴나 돌아오게 되지요. 마침내...


The dragon was so tired he didn't even move.
그 용은 너무나 지쳐서 움직이지 조차 못했어요.


완전히 잠에 빠진 용을 지나쳐 드디어 약혼자를 구출하기에 이른 Elizabeth.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왕자님은 정말 홀딱 깨는 말을 내뱉습니다.


Elizabeth, you are a mess!
Elizabeth, 너 완전 엉망이구나!
Come back when you are dressed like a real princess.
진짜 공주처럼 차려입고 나서 다시 오도록 해.


이제 우리의 용감한 공주님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1981년에 발간되어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 그림책은 작가인 Robert Munsch가 어린 소녀 영웅들을 위해 쓴 이야기를 기초로 합니다. 수많은 동화 속에서 반복되어 왔던 왕자가 목숨을 걸고 공주를 구출하는 이야기가 여기에서는 완전히 뒤집힌 채 제시되고 있지요. 당시로서는 다소 혁명적이었던 이 역발상 때문에 작가는 작품의 의도에 대한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린 소녀들이 스스로가 영웅이고 가치 있으며, 단순히 뭔가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냥 별 볼 일 없는 누군가에 안주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하네요.


Elizabeth는 여느 이야기의 공주와 다름없이 평온한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별나게 까탈스러워 보이는 약혼자 Ronald 왕자를 사랑한다고까지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난데없는 용의 습격으로 모든 것을 잃은 공주는 자기 안에서 전에는 모르던 용기와 기지를 발견합니다.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던(어쩌면 보호가 아니라 차단이었을까요?) 성과 아름답고 우아한 공주의 의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녀 속에 있던 포기를 모르는 용감한 영웅이 깨어난 것이지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던가요?


일반적인 공주라면, 아니 그 나이대의 어떤 아이라도 울며 불며 주저앉아 있을 시간에 Elizabeth는 종이봉투를 전투복처럼 차려입고, 자신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왕자를 구하려 나섭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구해낸 그녀의 사랑, Ronald 왕자는 만나자마자 외모평가질을 해대지만요. 다행일까요? 엄청난 난리를 겪으면서 Elizabeth가 되찾은 것은 용기와 기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제대로 보는 법도 알게 된 것이죠. 화를 낼 만도 한데, 그녀는 쿨하게 왕자를 "Bum(얼간이)"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신나게 자기 인생을 찾아 떠나지요. 그녀의 성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훌륭한 점은 조금은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가볍고 유머러스한 터치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Michael Martchenko는 수채물감과 펜을 이용하여 에칭 판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으로 중세 유럽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살짝 예스러운 분위기를 잘 잡아내고 있고요.


사회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이 그림책은 용감한 소녀들을 위해서도 지나치게 소극적인 소녀들을 위해서도 좋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듣는 첫 번째 이야기가 그들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면 "공주를 구하려 목숨을 거는 용감한 왕자"와 "얌전히 납치되었다가 왕자의 구원을 받는 공주"의 이야기는 어떤 성별의 아이에게도 그다지 교육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이 조금은 반항적인 이야기는 어쩌면 다소 편향되었을 아이들의 성역할에 대한 인식에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딸들이 별것도 아닌 누군가가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그녀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을 강제할 때, -그 누군가는 친구일 수도, 연인일 수도, 선생님일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외칠 수 있길 바라거든요.


You look like a real prince, but you are a bum.
너는 진짜 왕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얼간이일 뿐이야.




작가 웹사이트 https://robertmunsch.com/

원어민이 읽어주는 오디오북 https://www.youtube.com/watch?v=UYxXIVChtQg

권장 연령 5~7세 / Lexile 지수 AD550L (Grad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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