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어른은,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린이라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어린이의 키에 맞추어 세상을 보고, 단단해진 마음의 근육들을 다시 부드럽게 바꾸는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는 저자의 태도에 육아를 하는, 어린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을 많이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저자 김소영은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다가 현재는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을 꾸준히 만나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쓸 때는 아이를 낳지 않은, 양육자가 아닌, 어린이 심리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자신이 어린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혹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다고 고백한다. 그간 "네가 애가 없어서 그래"같은 말을 많이 들어온 탓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이가 누군가의 자녀로만 그치는 존재가 아니다.
어린이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학생이지만 각자가 우리 세계의 어엿한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걸 잘 알면서.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회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p.7)
하지만 양육자가 아니기 때문에 도리어 어린이를 어엿한 한 존재로 바라보고, 우리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 더 정확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것 같다. 거리두기의 미학이랄까.
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 양식을 고민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p. 42)
어린 시절, 엄마 아빠를 따라 어른들의 약속장소에 가거나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면 그 시간을 버티는 것이 참 힘들었다. 불편한 의자, 알아들을 수 없는 어른들의 언어, 심각한 얼굴들, 떠들면 안되는 엄한 상황들. 너무 지겨워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왜 이렇게 애처럼 굴어?"라며 쓴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최근에 노키즈존이 많아졌다. 고성을 지르고, 직원을 하대하는 노아재존은 없지만, 노키즈 존은 있다. 노키즈존은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이해는 가지만, 나는 차별로 얻어진 평화가 여전히 불편하다. 어른이 좀 더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그럴 순 없을까.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 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 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 20)
세상에는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 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어린이와 무관한 사람은 없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그 사실을 아주 따뜻하고, 다정하게 일깨워준다.
반짝이는 구절들
쓰면서 알게 된 한 가지는,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7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18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28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애쓰다 멍드는 어린이가 어딘가에 늘 있다. 33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따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41
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 양식을 고민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42
악몽은 대비할 수도 없고 익숙해질 수도 없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가장 헌신적으로 협조한 집단이다. 어린이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어른들도 알아야 한다. 62
나는 어린이가 글을 쓰다가 모르는 글자를 물어보면 되도록 책에서 찾아서 가르쳐 준다. ‘책에는 뭐가 많이 있다’‘선생님도 책을 보고 알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91
여행지 관광 안내소 직원에게 엄마 아빠가 지도며 상품 할인 쿠폰 등을 받고, 이런저런 안내를 받는 동안 데스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싶어서 기를 쓰는 어린이를 본 적이 있다. 불편한 자세로 딱 붙어 서서는 “그게 뭐야?” “어디로 가래” “나도 볼래”라며 계속해서 질문과 의견을 쏟아냈다. 그전 같았으면 ‘어린이들은 밖에 나오면 말을 더 안듣는다더니, 정말 보채는구나’하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때는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를 만나기 시작한 뒤여서인지 저 어린이가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따. 여행을 와서 들뜨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은 나나 어린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정보가 오가는 대화에 참여하기는커녕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제대로 볼 수조차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 하는 것 같다. 197
공공장소에서도 어린이는 마땅히 ‘한 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배제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쪽으로 어른들이 지혜를 모으는 게 옳다. 203
“아동을 놀리기 좋은 상대로 바라보는 시각은 시청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동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세이브더 칠드런) 226
나는 자극적인 연출보다 바로 이 점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감상하고 싶어하는 것. 226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는 대상화된다. 어른이 맘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227
어린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254
냉소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소식들이 쏟아질 때면 자연히 포기하는 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을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주고 싶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