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토마스 G.롱, 『고통과 씨름하다』
지나치게 분석적인 사람인 나는 내 고통에 대해 전혀 해석이 되지 않을 때가 참 괴롭다. 신은 왜 이 세상에 고통을 허용했는지, 악을 허용했는지. 세상의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내 일처럼 괴로워하는 초예민감각자다. 심지어는 스물 다섯, 시민단체에서 일할 때 별명이 "세상 짐 지고가는 어린양"이었다.
7년 전, 일시적인 해리성 기억상실과 공황증상, 악몽장애가 함께 찾아왔다. 신체화 증상도 동반됐다. 깨질듯한 두통으로 그간 MRI, CT 안해본 게 없다. 급성 위경련으로 응급실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다. CT상의 소견은 정상..
난 그동안 내 고통을 원료삼아 성숙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다. 다른이의 아픔에 저울질 하며 나를 옹호하고 기만했다. 그런데, 총체적으로 찾아온 정신증과 괴로움 앞에 무너져갔다. 그동안 잘 해석해왔다고 여겼던 고통과 외상사건들이 전혀 해석이 되지 않았고, 늘 내 탓만 하다 나를 갉아먹던 나는 신의 장난질에 놀아난 것만 같은 분노에 치가 떨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런데 웃기게도, 난 저 말씀에 압도되어 내 고통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고들 말하는 대로 선하게 사용하고자 나를 고통속으로 또 밀어넣었다.
세상의 실제적인 고통, 곧 가설적 문제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영혼을 빚기 위해 창조의 일부로 주신 도구라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기에 제 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종말론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또 분석적인 나는, 어떻게든 신의 의도를 해석하고 싶어 이 책을 들었다. 절망적인 것은, 이 책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이고 다행인 것 역시, 이 책이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 하지만, 아직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세계와 뜻의 아주 일부분에 심정적 동의를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3년 뒤에쯤, 다시 읽어봐야 겠다.
나는 하나님이 이 일을 명확히 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런 식의 나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선하고 필수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이신다면, 결국 이것은 나쁜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생각 자체를 수용할 수 없었다.
반짝이는 구절
신정론은 곧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럼에도 이 세상에 부당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붙들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17
고통에 대해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바를 전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숙고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은 기도다. 64
"가장 괴로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행위" 67
나는 하나님이 이 일을 명확히 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런 식의 나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선하고 필수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이신다면, 결국 이것은 나쁜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생각 자체를 수용할 수 없었다. 73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인지 저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시련을 잘 극복해내리라 믿어요.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시련을 주시니까요." 해리엇은 이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더 연약했더라면 아들 로비가 아직 살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111
인간은 충만한 잠재력을 가진 미성숙한 자로서 하나님을 향해, 인간성의 충만한 완성을 향해 먼 거리를 순례해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 순례 과정에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 감추어져 계셔야 한다. 그분의 존재가 충만하게 나타난다면 이것이 우리를 쓰러뜨려, 인간의 의미 있는 선택과 자유의 실행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137
이미 완벽한 행복의 상태 속에 고정되어버린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갈망하고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자신을 향해 자라오는 존재를 원했던 것이다. 138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실제로 영혼을 빚어가는 일종의 순례로서, 언젠가 결국 모든 게 잘 되리라는 종말의 소망을 향하여 때로는 지치고 고통스러운 길에서 한 발 또 한 발 내딛는 과정임을 인식한다. 이레나이우스의 신정론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과도 잘 어울린다. 139
이레나우스의 접근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먼저 영혼을 빚는다는 논리의 이 신정론은 비극적이고 터무니 없는 악이라는 모래톱에 좌초하고 만다. 악과 고통 중 어떤 형태는 너무도 거대하고 비이성적이며 구속적 가치마저 전혀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영혼을 빚어가는 기능이 작용하는 것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140
세상의 실제적인 고통, 곧 가설적 문제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영혼을 빚기 위해 창조의 일부로 주신 도구라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기에 제 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종말론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142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관여하지만 창조 세계에 완전히 묶이지 않으신다. 144
만일 세상의 권력을 이해하고 강력한 통치자나 막강한 군대를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께 부여하는 것이다. 147
욥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책이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는 것이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 153
이 책의 목적은 고통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갈망을 타도하는 데 있다. 신정론을 논증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 즉 욥의 고통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명예를 옹호하고자 노력한 것은 욥의 친구들인데, 이들은 이 글에서 악당이다. 155
욥기는 선하신 하나님과 무고한 고통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또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56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신학적 우주를 붕ㅇ괴시킬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163
욥의 이전 세상은 질서 잡힌 세상이며, 이 질서 자체가 공의에 대한 이야기를 가능케 했다. 172
고통 받는 욥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불공정했다. 이제 폭풍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데, 이 음성은 욥이 가진 질서와 규칙의 체계가 애당초 하나님의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욥의 것은 질서에 대한 인간의 계획으로 땅에서 하늘로 투영된 질서일 뿐이다. 부당하다고 울부짖는 욥의 울음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질서라는 인간의 개념을 하나님에게 강제하려는 시도였다. 173
신약성경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는 고통스러운 부정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욥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부정의 불가피한 실재를 강조한 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제공한다. 175
궁극적으로 우리는 한 인간의 고통이 불공평하다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 도덕적 질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도식, 즉 우리가 사용하는 바로 그 도식을 하나님과 맞바꾸기를 원하는가? 다른 말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신 그분을 신뢰하는 인간으로 기꺼이 나아가겠는가? 바로 이것은 겟네마네 동산의 무게에 준하는 결단이다.
욥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신정론적 질문에 대해 타당한 해결을 찾지 못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178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보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만큼 희미하다. 182
우리가 밭으로 나가 모든 악의 가라지를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의 특징을 과소평가하는 동시에 선을 향한 우리 자신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214
전능하신 하나님은 면전의 악을 멈추시기 위해 엄청난 병력의 천사들을 보내실 수 있지만 이런 종류의 능력 대결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218
하나님이 악을 뿌리 뽑지 못하시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과 교전을 벌이는 일이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 곧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된다고 생각하는 방시긍로 능력을 사용하는 신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에 신실하지도 않으며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는 하나님도 아니다. 220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한다. 221
우리는 하나님이 큰 칼을 휘두르며 창조 세계에 뛰어들어 악을 쳐내시기를 원한다고 믿는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의 범위를 벗어난다. 222
사람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 치유된다. 224
하나님의 사랑의 비폭력성은 궁극적으로 악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평화의 왕은 우주적 악에 대한 신적 용사이시다. 226
언젠가 하나님은 승리하시고 악은 정복되겠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비극과 고통이 존재한다. 228
기독교는 하나님이 지금, 역사의 중간,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악을 다루시기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도 증거해야 한다.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