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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독서노트]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 이재영

by 문슬아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를 응징하며 정의를 이뤘다고 하는 보복 논리가 저울의 다른 한 추에 놓인 피해자를 오히려 소외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왔다.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이 균형을 잡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 저울에 피해자의 자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p.52~53



법은 어떻게 피해자를 소외시키는가?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한 장면이다. 법이 어떻게 피해자를 소외시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회는 피해자의 이야기보다는 가해자가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 가해자가 어떤 어린시절을 보냈기에 저런 사람이 되었나 그 서사에 더 관심을 갖는다.


사법기관은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고민하지만, 피해자가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책임 소지에 선을 긋는다.


이 책에 따르면 범죄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침해다. 결국 법을 깨뜨린 행위가 핵심이고 이 관점으로 보면 국가는 범죄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이런 응보적 정의 관점에서 가장 구조적으로 소외되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다.


가해자는 법정에서 자신이 벌인 행동에 대해 반성이나 후회를 하면서 사과를 표현한다. 그런데 그 사과를 받는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처벌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과와 반성을 직접 표현할 때가 많다.


결국 자신이 야기한 고통만큼의 고통을 당하는 응보적 정의의 원칙은 사회적으로는 고통의 총량을 두배로 늘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통이 치유되어야 사람과 사회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는데 고통의 총량이 오히려 더 증가하는 현상이 일반화되는 것은 모두를 병들게 만든다. 결국 피해자는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만, 가해자는 절차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강화되는 왜곡 현상이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p. 56


범죄로 발생한 피해와 깨어진 관계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는 범죄를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피해를 준 행위'로 이해한다. 따라서 범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와 깨어진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핵심은 잘못된 행위로 발생한 다양한 '정의 필요'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다.


회복적 정의는 유죄를 확정하고 처벌을 결정하려는 사법의 목표와 이를 회피하려고 애쓰는 가해자의 이해관계가 법정 공방의 핵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피해가 발생했고, 그 피해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피해자에게 어떤 필요가 생겼고 어떻게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가에 더 깊은 관심을 둔다.


회복과 무관한 처벌은 불의한 사회를 구조화한다.


이 책에는 자신의 잘못된 행위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차자가서 사과하거나 반성을 표현할 기회보다 자신들의 처벌 권한을 가진 이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반성하는 데 익숙해진 청소년들에 대한 사례가 나온다. 학교폭력을 저지른 가해 학생측은 반성이나 책임을 위한 노력보다 자신에게 내려진 처벌과 불이익을 무효화하기 위한 노력이 더 많아진 현실에 대한 지적도 이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결국 "불의한 사회는 악은 구조화하고, 피해자의 고통에는 눈감아 그들을 피해자 사이클에 가두어버린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사실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우려'는 잘못을 한 사람이 강제적 처벌을 수행한 후에 '나는 책임을 졌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p. 101


나는 저 대목에서 영화 <밀양>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유괴범죄로 아들을 잃은 주인공이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가지만,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며 평안한 얼굴로 말하는 가해자 앞에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


현 사법체계가 작동하는 방식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를 국가를 통해 받았으니, 자신은 이미 책임을 졌다고 생각할 여지가 많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배제된다. 저자는 "가해자에게 생겨야 할 관점의 변화는 '잘못'에 대한 인식과 인정을 넘어, 그 잘못이 일으킨 '피해와 고통'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열쇠는 회복적 정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 '엘마이라 사건'을 통해 "나쁜 사람들을 제거하고 통제함으로써 지역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상식이 깨지고, 오히려 가해자로 하여금 피해를 회복하는 직접적 책임에 참여하게 하고 인정과 용서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게 된" 사례를 소개한다.


자발적 책임이란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자발적 책임'을 질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자기가 일으킨 행위가 초래한 결과를 보고, 듣고, 느낄 기회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스스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 자율권과 주변의 지원을 통해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어떤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는 의미는 '그 피해가 얼마나 회복되고 있는지', '자발적 책임이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지', '그 결과가 관계와 공동체의 회복을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정의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반문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피해자의 목소리


진정한 피해 회복은 피해자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힘을 되찾도록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p.110



회복적 정의에서 가해자는 비난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나름대로 자신이 잘못한 행동에 대한 상황과 맥락을 설명하는 기회를 부여받는 사람이 된다. 책임의 자발성을 위해서다.


그리고 피해자의 이야기는 누구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표현되어야 하는 말들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이해하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서 풀어내야 하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집단적 공감과 지지를 통해 자신이 단지 피해자였을 뿐임을 인정 받아야 한다.


우리는 피해자를 주체로 보지 않고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문화에 익숙하다. 하지만 가해자가 존재한다면 피해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피해자의 회복이 가해자의 책임이 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회복적 정의는 목소리가 없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지도록 돕는 전반적 노력을 의미한다. p. 290


저자는 책 말미에 한 사회가 균형 잡힌 정의를 이루려면 범죄자의 교화를 위해 국가가 교정시설을 운영하듯이 피해자의 회복을 위한 전문기관들이 사회에 같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 사회 피해자가 진정으로 회복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지적, 물적 토대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 소개


이재영. 미국의 EASTERN MENNONITE UNIVERSITY에서 회복적 정의의 세계적 권위자인 하워드 제어 박사로부터 회복적 정의를 배우면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사회에는 생소한 개념인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을 알리고 학교, 사법, 조직, 지역사회 등 사회의 여러 역영에서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고 적용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회복적 정의 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과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를 설립하였다. 현재 두 기관의 대표로 동료들 함께 사회 곳곳에 필요한 회복적 정의 실천가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육부, 경찰청, 대검찰청, 법원 등에서 회복적 생활교육과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 관련 자문위원과 교육위원으로 역할을 해왔다. 아내 케런(KAREN)과 네 명의 자녀들과 함께 남양주시 덕소에 위치한 피스빌딩에서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평화와 화해의 새로운 패러다임》 《학교현장을 위한 회복적 학생생활교육》 등 회복적 정의, 피스빌딩, 갈등전환, 분쟁조정 관련 몇 권의 역서와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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