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나와 너의 해방일지'

듣보잡 매거진 에디터의 성장기 8화

by 문슬아


2022년 6월


평생 이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사유를 자극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살아가는 일 자체가 누군가의 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은유작가의 인터뷰집 <크게 그린 사람>에서 그는 이런 사람을 만나고, 썼다.


그가 크게 그린 18명의 사람들을 읽으면서 내 부끄러운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도 그가 "살아가면서 참조할 수 있는 사람 이야기가 많아야, 삶에 대한 질문을 비축해두어야 내가 덜 불행하고 남을 덜 괴롭힌다"고 한 말처럼, 그런 사람에게로, 공간으로 내 시간과 발걸음이 향하기를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직장에는 좋은 사람도 있지만,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도 있고, 살아가는 방식에 실망을 거듭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이제는 기대조차 하지 않게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일은 나를 점점 냉소적 인간으로 만든다. 어쩌면 내 속이 좁은 걸지도 모르겠다.


닮고 싶든, 닮고 싶지 않든 내 옆에 함께 있는 사람의 에너지에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쪼잔하게 구는 사람 옆에 계속 있다보면, 나도 점점 쪼잔해진다. 그 사람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사라진다.


카프카는 '한 인간이 되는 일은 때때로 인간들을 감내하는 일'이라고 했다. 직장은 그런 곳이다. 같은 공간에서 그럼에도, 나를 짓누르려는 나쁜 공기에 잠식당하지 않고, 누군가에 해방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는 인터뷰가 좋다. 인터뷰를 나가는 게 좋다. 그 과정은 정말 힘들지만, 사서 고생이지만.


물론, 내 마음대로 모든 인터뷰이를 정할 수는 없다. 매체 성격에 맞는 대학병원 교수들을 주로 만나야 한다. 그마저도 인터뷰가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바늘구멍에 낙타 들어가듯 인터뷰를 잡는다. 이전 직장에서 일할 때 인터뷰 섭외력은 내 능력이 아니라 회사 인지도였구나, 깨닫는다. 물론 나라는 사람의 인지도와 능력도 큰 몫을 하겠지만 말이다.


늘 비슷한 지향을 가진 이들과 함께 살다가 낯선 도시 김천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특히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렇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우리들. 그래서 서로를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지만, 넘어설 수 없는 경계도 느껴진다. 내가 쓰는 글이 저 멀리 서울에 있는 지인들에게는 읽히지만, 당장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어렵다고 느낄 때, 우리끼리만 읽는 닫힌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직장에서 관계의 균형, 업무분담의 균형, 페르소나와 무의식의 균형, 그리고 글쓰기의 균형. 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갈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만큼은 잃고 싶지 않다. 번아웃. 타버리고 재가되는 일이 아니라, 나도 살리고, 나의 살아감이 누군가의 해방에 기여하는 직장생활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