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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Jun 11. 2023

인터넷 없이 제네바 여행

물과 시계의 도시, 제네바

 제네바 당일치기 여행을 가지 않겠냐는 친구의 제안에 덥석 버스표를 예매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배탈이 나 여행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원래 여행을 하기로 한 날보다 이틀이 지난 뒤, 새벽 6시에 제네바행 버스를 탔다. 동이 트는 아침에 스프링클러가 열심히 밭에 물을 뿌리는 풍경을 바라보던 눈은 이내 점점 무거워졌다. 얼마나 잤을까, 얕은 언덕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높은 산맥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참 ‘여기가 스위스구나!’ 감탄하고 있을 때, 그제야 창밖에 조금 있으면 스위스 국경에 도착한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아무런 검사 없이 국경을 넘었고, 국경을 지난 지 얼마 안 돼 호수가 있는 도심에 도착했다. 선크림을 한 번 더 바르고 요금 폭탄을 피하고자 데이터가 잘 꺼져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제네바에 발을 디뎠다.



 새로운 세상에 던져진 우린 어딜 가야 할지 정해야 했다. 오프라인에서 사용할 핸드폰 지도가 있었지만, 관광안내소에서 종이 지도를 받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기차역이 나왔다. 기차역은 깨끗하고 고급스러워 호텔 로비가 떠오를 정도였다. 이불만 깔고 자면 될 것 같은 이 쾌적한 공간에서 관광안내소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단서를 얻었는데, 그건 바로 시내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였다. 이 단서를 따라가니 도시 지도와 명소 곳곳을 가리키는 안내판을 발견했다. 하지만 지도와 방향 표시가 알려주는 구도심을 방향은 달랐다. 스위스 표지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지도가 맞을 거라고 나름의 추론을 내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결국 관광안내소는 찾지 못했고 한참 헤매다 호수를 건너 구도심으로 흘러 들어갔다. 호수 저편엔 140m의 분수가 높이 치솟아 있었다.


구시가지에 가기 위한 여정


 물과 시계의 도시인 제네바의 구도심엔 이곳저곳 시계가 걸려있었고 음용 가능 여부가 쓰여 있는 크고 작은 분수들이 있었다. 언덕을 얼마나 올랐을까 골목 사이로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주랑이 보였다. 제네바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다. 이곳은 4세기부터 약 1000년간 제네바 주교의 성당이었지만,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개신교 예배 장소로 사용된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보는 모습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는 1150년에서 1250년 사이라고 한다. 교회의 개장 시간이 10분 정도 남아 그늘에 앉아 견학 온 초등학생들의 유쾌한 수다를 엿듣다가 주랑 현관을 지나 입장했다. 군더더기가 하나 없이 정갈한 교회였다. 천주교 성당이 익숙한 내게 성상이 없는 교회 건물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대성당을 이사하느라 누군가 성상을 박스 안에 다 넣어서 없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대표적인 종교 개혁가 칼뱅은 설교했는데 그가 앉았던 의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나무의자의 앉는 부분이 너무 작아 불편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10세기가량 미사가 집전되었다가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설교가 이루어지는 역사의 격동을 간직한 교회를 방문하며 공간이 주는 새로움과 함께 유럽 역사의 한 부분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제네바 성 베드로 대성당

 

 교회를 나와 산책을 하며 시청과 대포를 구경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이 흐르는 작은 분수 앞에 섰다. 손을 흐르는 물에 닦고 물을 손에 받아 마시려고 하자 친구가 자신의 물병을 쓰라고 건네주었다. 덕분에 인간답게 텀블러로 물을 마시고 친구가 싸 온 샌드위치를 한적한 공원에 앉아서 먹었다. 바게트에 루콜라와 햄을 넣은 샌드위치는 맛있었고 우린 비둘기와 참새들에게 둘러싸인 채 에너지를 채웠다.


친구가 싸 온 샌드위치를 나눠 먹은 공원


 샌드위치를 먹고 기운을 차리고 화장실을 갈 겸 제네바 예술&역사박물관을 들어갔다. 전시를 관람하다 자주색 커튼이 쳐 있는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여러 전시물들이 즐비하게 전시된 이곳에서 화장실 표지를 발견했다. 화장실에 가까이 가자, 나무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제네바 도착 이후,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 화장실을 사용한 뒤 무사히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자동문 센서를 찾으면서 사라졌다. 화장실에서 나와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밟으며 회화 위주로 전시를 관람하다 터질 것 같은 종아리를 진정시키고자 잠시 앉아있다가 레만 호수로  보이는 공원에 가서 누워있었다.



 공원에 누워있으면 바람을 타고 140m의 분수에서 흩어진 물방울들이 비처럼 떨어졌다. 흩뿌리는 빗방울을 견디며 여유를 만끽하다 분수를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등대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활한 이 호수에선 바다 냄새가 났고 물은 눈동자처럼 맑았다.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 뛰어들고 싶었지만, 아름다움을 향유하기 위해 수영을 할 수 없는 몸뚱이를 레만 호수에 투신할 용기는 없었다. 등대에 다다랐을 때쯤 거짓말처럼 커다랬던 분수는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우릴 골탕 먹이기 위해 제네바 시에서 때맞춰 분수의 밸브를 잠근 듯이. 그렇게 등대 주변에 자리를 잡고 분수가 다시 솟아날 때까지 기다렸다. 햇빛에 허벅지가 타들어 갈 때 친구에게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했고 친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분만 기다려 보자고 했다. 1분 후, 잠긴 밸브는 꿈쩍하지 않았고 우린 장 자크 루소 생가를 보러 갔다.


 구시가지를 뒤져 루소 얼굴이 현수막이 붙어있는 생가를 찾아냈다. 서점인 일 층에 들어가자 생가를 보기 위해선 2층에 올라가야 한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서점에서 « 루소 생가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 물었다. 그러자 점원은 우리가 학생인 걸 확인하고 « 학생 요금은 5 스위스 프랑이에요. »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과 자유의지는 18세기 계몽철학자 루소 생가 방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잠깐 방문했던 루소 생가


 점심으로 먹은 샌드위치가 다 소화되어 배가 고파져 슈퍼에 들어갔다. 고심 끝에 샌드위치 하나와 포도 한 팩을 샀다. 공원에 있는 분수에서 포도를 씻고, 그늘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반으로 쪼개 나누어 먹었다. 이렇게 3시쯤 스위스에서 마지막 식사 겸 피크닉을 했다. 공원엔 유치원에서 나온 아이들이 바나나를 나누어 먹으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약간의 빗방울이 떨어지긴 했지만, 평화로운 8.5 스위스 프랑 짜리 만찬을 망칠 순 없었다.


제네바에 즐비한 공원과 분수


 숲길을 걷고 아파트를 지나자, 회사 본사처럼 생긴 큰 건물이 나왔다. 그리고 수많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수와 다리 하나가 부서져 있는 조형물이 있었다. 이 예술작품은 무기로 인한 피해자들을 상징하고 국가에 이에 대한 대책과 행동을 촉구하는 상징물이다. 부서진 의자 뒤엔 스위스 제네바 유엔 사무국이 있었다. 수많은 유엔 회원국 국기 사이에서 한눈에 태극기를 찾을 수 있었다. 유엔 사원증을 멘 직원들을 마주쳤는데 그들이 멋있어 보였다. 유엔이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공고히 하고, 신식민주의적인 기구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세계적 차원에서 인류 공동의 위기에 대응하는 기구로서 기여하는 부분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유엔 직원들이 자기 능력을 활용해 세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기여하기에 언젠가 내가 하는 일이 세계 불평등 감소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다 프랑스 대로에 위치한 유엔난민기구를 발견했다. 기사에서만 접하던 기구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어서 정말 만족스러웠다. 이 자극을 개인적 삶과 공공선이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고 싶다.


제네바 유엔 사무소와 유엔난민기구

버스는 예정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인터넷을 쓸 수 없는 우린 정류장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디며 오늘 여행을 곱씹어 보았다. 인터넷 없이 한 첫 여행이었던 것 같다. 인터넷이 주는 정확함과 방대한 정보가 선사하는 편리한 여행보다는 최대한 주변 환경에 주의를 기울여 순간을 선택하고 우연에 몸을 맡기는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오랜만에 내 몸에 딱 맞는 여행을 한 것 같아 행복했다. 행복감과는 별개로 지친 몸을 예정 시간보다 50분 늦게 온 버스에 싣고 자면서 프랑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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