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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Jun 02. 2023

첫 부르고뉴 여행, 디종

부엉이와 머스터드의 도시

 그냥 훌쩍 떠나는 것도 좋지만, 자주 여행에 이유를 붙이길 선호한다. 이번에도 학교 시험과 프랑스어 자격증 시험에서 해방된 순간을 만끽하고, 어느덧 4개월이 지난 프랑스 생활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자 하는 명분을 붙였다. 이 여행은 지하철이 운행하지 않은 관계로 역에 늦게 도착해 한차례 수포가 되었다. 이틀 후 다시 기차표를 예매했고 다행히 지하철이 정상 운행을 한 결과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기차는 기내에 울려 퍼지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개의치 않고 시속 280km가 넘는 속도로 디종을 향해 달렸다.

룩셈부르크행 기차타고 가다가 디종에서 내리기

 디종에 가기 전에 어떠한 정보도 찾아보지 않았다. 기내에서 유튜브를 좀 찾아보긴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아 이내 화면을 꺼버렸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디종은 길바닥에 관광 명소를 알려주는 부엉이 표시가 있어서 그것만 따라가면 도시를 충분히 구경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부엉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함께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 부르고뉴의 핵심 도시 디종에 도착했다.


   역을 나오자, 한적하고 화창한 도시를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부엉이를 따라가면 된다고 하지만 지도가 필요할 듯해서 역에 붙어있는 관광안내소에 들으려고 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어딘가 있을 부엉이를 찾아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얼마간 땅바닥을 보며 평화로운 거리를 걸었을까 앞에 걸어가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넘어지셨다. 순간 심장에 문제가 생기셨나 걱정하며 황급히 할아버지에게 긴장한 채 다가갔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셔서 일어나시는 걸 도와드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낯선 도시에서 그곳에 사는 주민에게 작은 도움을 건네며 디종과 심리적으로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기자기한 분수와 부엉이 화살표 찾으면서 본 디종의 길바닥

 디종과 마음의 벽을 좁혀가고 있을 때, 개선문과 흡사한 아치형 문을 발견했다. 문 뒤편의 풍경은 디종 구시가지인 듯했다.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직관적으로 느꼈고 이 문을 디종의 대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18세기에 지어진 이 건축물은 겉모습은 변화에 무딜 것 같이 견고한데, 이름은 프랑스 역사의 변화를 온전히 맞으며 수차례 바뀌었다. 초기엔 부르고뉴 지방의 통치자인 꽁데(prince de Condé)에게 헌정되며 꽁데 문 (porte de Condé)로 불리다가 혁명을 거치며 자유의 아치문(arc de la Liberté)으로 불리다가 19세기엔 수도원장인 기욤 드 볼피아노(Guillaume de Volpiano) 이름을 차용해 기욤 문(porte de Guillaume)으로 불리다 다시 왕정이 복고되면서 꽁데 문으로 불렸다가 현재는 기욤 문으로 불리고 있다. 여행 당시엔 문에 담긴 역사를 몰랐기에 이 유적보단 기욤 문을 돌아보다가 발견한 부엉이가 더 신기했다. 부엉이를 발견했지만, 부엉이의 화살표는 다시 기욤 문으로 가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화살표 반대편에 성당의 첨탑이 보였기에 디종 관광청의 의도를 거슬러 부엉이가 가리키는 반대편에 있는 첨탑을 따라가 보았다.

무작정 걷다가 발견한 기욤 문과 드디어 발견한 부엉이 화살표!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지나며 첨탑을 향해 가는 도중에 성당 하나가 나왔다. 이 성당은 성 베니뉴 대성당이었는데 표시판엔 내부에 기가 막힌 오르간이 있으니 보고 가라고 관광객을 꼬드기고 있었다. 또한 분홍빛이 도는 돌이 군데군데 사용되었는데 이 색을 보고 있으면 부르고뉴의 와인이 떠올라 성당 내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은 전체적으론 육중한 느낌이 들었고 장식이 많지 않아 검소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스테인드글라스는 정말 화려했다. 오르간은 정말 컸는데 우연의 일치로 오르가니스트의 연습 시간과 내가 성당에 머무는 시간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성당을 나와 극장과 성당 몇 군데를 더 돌아본 뒤, 드디어 부르고뉴 공작의 궁전 근처에 위치한 관광안내소에서 디종 지도를 구할 수 있었다.

성 베니뉴 대성당

 지도를 손에 넣자 무언갈 입에 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스터드와 와인의 도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뵈프 부르기뇽을 먹어볼까 생각했지만, 식당을 찾아볼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맥도널드와 버거킹 중에 어딜 갈지 깊이 고민한 뒤, 버거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무설탕 환타와 작은 햄버거를 먹으며 정신을 차린 뒤,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다.


노트르담 성당은 1250년에 완공된 디종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지만, 사실 성당 근처에 있다는 소원을 들어주는 부엉이 조각이 더 구미 당겼다. 하지만 어렸을 적 신부님이 뿌린 물을 이마에 맞은 사람으로서 성당을 먼저 구경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성당 안에는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만들어졌을 거라고 추정되는 임신한 목조 성모상이 있는데 부엉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간단히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성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가 성당 측면을 살펴보며 부엉이를 찾았다. 한 바퀴를 돌자 그제야 사람들이 하도 문질러서 형체를 잃어버린 부엉이가 있었다. 나도 보이자마자 오른손을 뻗어 부엉이를 파괴에 일조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프랑스 생활 잘하게 해 주세요. 불어 잘하게 해 주세요’ 이 정도 수준에 그쳤을 듯하다. 나중엔 안 사실이지만 왼손으로 문질러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과 소원들어주는 부엉이

노트르담 성당 정면을 수놓은 51개의 가짜 석루조를 뒤로하고 부르고뉴 공장의 궁으로 미술품을 보러 갔다. 현재 미술관과 시청으로 사용되는 궁에 도착했다. 궁전 벽 곳곳엔 디종돌(pierre de Dijon) 중에도 희귀한 장밋빛이 도는 돌이 사용되어 부르고뉴를 여행한다는 느낌을 고취했고 궁전 앞 광장에 분수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하지만 기차 시간이 2시간밖에 남지 않았기에 여유를 즐길 수 없었다. 가방 검사를 하고 미술관 표를 받을 수 있었다. 봐도 잘 모르겠는 현대미술을 빠르게 훑고 중세, 근대 미술을 감상했다. 미술관은 많은 회화, 조각품은 물론 부르고뉴 공작이 사용했던 식기부터 탁자까지 소장하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다 보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벌써 기차 출발 시간은 1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팸플릿에 있던 모네 그림을 보고 싶어서 인상주의에 미친 사람처럼 모네의 에트르타를 어디 가면 볼 수 있는지 물어댔다. 그리고 마치 한 마리의 북극곰이라도 더 지키고자 하는 환경운동가의 마음으로 프랑수아 퐁퐁의 북극곰을 찾아다녔지만, 아쉽게도 펠리컨과 소만 볼 수 있었고 서둘러 미술관을 나와 디종역을 향해갔다. 디종의 대문인 기욤 문을 지나 급하게 간 기차는 40분 연착을 했고 덕분에 역에 앉아 충분히 수분을 섭취할 수 있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c 플랫폼에서 기차를 탔고 오늘 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다. 무슨 의미를 주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디종에 내려 하루 종일 도보로 여행하다 다시 처음 여행을 시작했던 역으로 돌아온 오늘 하루에 기분이 좋았고, 길을 잃고 발길 가는 대로 걸어서 완성한 여행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인생도 이렇게 살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한 10분쯤 하다가 잠이 들었다.

정신없이 본 프랑수아 퐁퐁의 조각과 모네의 에트르타


결국 기차역 가는 길에 만난 퐁퐁의 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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