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그곳이 품고 있는 시대를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어떤 공간은 현대에 존재하지만, 중세를 품고 있기도 하고,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코트디부아르 경제 수도인 아비장의 교통체증에서 벗어나 북서쪽으로 2시간을 넘게 달리자, 한적하고 잘 닦인 도로가 펼쳐졌다. 창밖은 아비장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여유 가득한 속도의 시간 너머로 거대한 돔이 보였다. 이 육중한 성당에서 막 도착한 코트디부아르의 행정수도, 야무수크로(Yamoussoukro)에 담긴 어떤 시간을 발견할 수 있을까.
1901년 프랑스 식민 통치 시절로 야무수크로는 행정수도도 아니었고, 야무수크로라고 불리지도 않았다. 바울레(Baoulé)족의 일파인 아쿠에(Akouè)족 출신 야무수(Yamoussou) 여왕이 다스리던 이 땅은 응고크로(N’Gokro)라고 불렸다. 몇 년 후, 자말라보(Djamalabo) 지역의 아쿠에족 대표가 프랑스 식민 정부에 대항하여 본지(Bonzi)에 있던 프랑스군 기지를 공격했다. 해당 지역을 통치하던 프랑스인 시몽 모리스(Simon Maurice) 행정관은 쿠아씨 응고(Kouassi N'Go)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그의 조카인 야무수 여왕의 거처로 몸을 피했다. 이후, 쿠아씨 응고는 부족원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하여 전쟁을 막았다. 사태가 진정되자, 행정관은 프랑스군 기지를 응고크로로 옮기는데, 지역 이름을 여왕 이름인 ‘야무수’에 바울레어로 마을을 뜻하는 ‘크로(kro)’를 붙여 야무스쿠로(Yamoussoukro)라고 명명하여 야무수 여왕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여전히 야무수크로가 응고크로로 불리고 있던 1905년, 야무수 여왕의 조카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이 도시를 압도하는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Basilique Notre-Dame de la Paix)’ 건축을 주문한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대통령,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다. 대농장주, 의사, 노동조합장을 거쳐 프랑스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코트디부아르 대표로 다른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 대표들과 협력하여 강제 노동 철폐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아프리카 내 그의 정치적 입지가 커졌고, 1960년 프랑스 식민 지배를 벗어난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1993년까지 33년 동안 대통령직을 유지한 그는 1983년 수도를 아비장에서 야무수크로로 이전했고, 1986년에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프랑스 식민 지배 시절 수도였던 아비장을 벗어나 독립적 국가 정체성 제고를 위해,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야무수크로로 수도 이전을 했다. 새로운 행정수도에서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는 거대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바티칸 3배에 달하는 부지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한다. 이 광활한 부지를 땡볕에 땀 흘리며 걷다 보면 어느새 98,000톤으로 추정되는 성당 건물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기둥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본뜬 이 거대한 건축물의 내부 바닥은 유럽 각지에서 수입한 대리석과, 세상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36개 프랑스 제작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졌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내뿜는 웅장함과 화려함에 잠시 넋을 잃고 공간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엄숙함을 음미해 보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천천히 살펴보다 갑자기 눈에 띄는 검은 피부를 가진 인물을 발견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묘사한 유리창에 예수와 지척에 있는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의 구원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자기 종교건축물을 짓고자 했던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성당을 사망 전에 완공하는 것이었다. 1905년 태생인 그는 공사가 시작한 1986년 이미 고령이었기에 이른 준공을 위해 1,500명의 노동자와 24개의 기업이 성당 건축에 매달렸다. 그 결과, 그가 바란 대로, 1989년 성당이 완공되고,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축성했다.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는 이 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기도할 수 있었고, 현재 그가 앉았던 자리는 방문객들의 볼거리가 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성당 완공 4년 후인 1993년에 사망하며 결국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만, 건축에 반대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우선, 가톨릭 신자가 전 국민의 22%밖에 차지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국민 4분의 1도 믿지 않는 나라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높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에 손꼽을 종교건축물을 짓는다는 건 쉽게 납득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반대의 목소리를 낸 사람 중엔, 지금은 성당을 지을 때가 아닌 공장을 지어 경제 성장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또한, 당시 바티칸 당국도 엄청난 건축 비용에, 일부는 사회적 사업에 활용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내 빠르게 상승하는 이슬람교 교세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세를 유지 및 확장하려는 전략으로 더 많은 작은 교회 건설을 추구했던 바티칸은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이 이 엄청난 규모의 성당을 기증했을 때, 난처했다고 전해진다. 모든 비용을 초대 대통령 자신이 충당했다는 사실과 성당의 거대함은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효과적이었고, 종교를 불문하고 현재 코트디부아르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야무수크로가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대는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의 시대이다.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 초대 대통령을 떠올리며 그를 영속하게 한다. 그가 바란 대로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모든 의도가 성공적인 결과에 도달하진 못했다. 여전히 정부 부처, 대사관들이 아비장에 있어, 성공적인 수도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하여, 집권 내내 강조한 발전의 기반이 되는 평화는 초대 대통령 사후 일어난 내전으로 그의 정치적 유산은 크게 훼손되었다. 아비장 곳곳에 그려져 있는 그의 초상과 여기저기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장소를 보며 한 인물에 품었던 의문이 많이 해소되었다. 그가 발전의 전제조건으로 외쳤던 평화, 특히 정치적 평화가 코트디부아르 사회에 잘 안착하여 올해 10월에 있을 대선도 평화적으로 진행되길 기도한다.
참고자료
https://mairieyamoussoukro.ci/yamoussoukro/historiq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