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와 카카오
싱크대에서 망고 껍질을 깠다. 그리고 사자가 사냥감을 잡아먹듯이 순식간에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하나로는 성에 차지 않아, 냉장고에서 망고 하나를 더 꺼내 들어 무자비하게 뜯어먹었다. 싱크대 위에서 이루어진 과일 사냥으로 인해 삶은 곧바로 만족감으로 가득 찼고, 이렇게 과일을 먹다간 피가 필요 이상으로 달아질 수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이러한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 있는 세상에 산다는 건 매우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코트디부아르 어딘가 숨어있는 행복을 찾아 차에 올랐다. 이번에 먹어 볼 과일은 ‘카카오(Cacao)’였다. 남들 따라 산 카카오 주식이 선사한 자본주의의 쓴맛을 잊을 정도로 달콤할지, 카카오가 코트디부아르 사회의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카카오 농장을 방문하기 전, 이곳에 초대해 준 직장 동료의 가족이 지내는 마을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눴다. 마당엔 염소와 닭들이 뛰놀고 있었고, 테이블 위엔 미리 수확한 코코넛이 한가득 있었다. 마체테로 코코넛을 따자 엄청난 양의 달콤하고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목을 충분히 축이고, 농장으로 떠났다. 차에 에어컨이 없고 창문도 활짝 열리지 않는 관계로, 더우면 차 문을 열어야 했다. 열린 문으로 동네 사람들과 직장 동료가 나눈 수많은 인사가 지나갔고, 어느새 마을 지도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코트디부아르에선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 지도자에게 인사를 하고 누구의 지인인지와 방문 목적 등을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다행히 집에 계시지 않아, 우린 곧장 농장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수풀 속으로 난 신작로를 따라 15분쯤 갔을까 잘 정돈된 농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2헥타르 규모의 농장에서 자란 카카오나무엔 카카오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우리에게 카카오가 잔뜩 달린 모습을 보여주고자 수확 시기를 1주일 미뤘다고 하셨다. 농장에 심겨 있는 카카오는 3가지 종류였다. 가나 카카오, 프랑스 카카오, 코트디부아르 카카오. 카카오 경작자들이 카카오 열매를 구분하는 용어를 듣고, 카카오 생산 강국인 코트디부아르, 가나 이름이 붙은 카카오는 납득이 갔지만, 프랑스 카카오는 어떻게 이 용어로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경작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 코트디부아르에서 가장 먼저 경작된 카카오 품종이어서 프랑스 카카오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세 명칭이 정식 이름은 아니고, 농민들이 쉽게 카카오 종류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추측해 본다. 카카오 농장을 거닐며 설명을 듣고 있는데, 카카오 열매를 따 주시며 먹어보길 권했다. 흰 카카오 과육을 입에 넣자, 망고스틴 맛이 났다. 하지만, 과육이 씨를 얇게 싸고 있어 먹을 만한 부분이 많진 않았다. 그리고 씨가 그리 단단하지 않아, 씹으면 부서져 텁텁한 맛이 났다. 한번 과즙을 빨고 뱉는 식으로 과육을 맛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씨를 카카오 껍질 속에 넣고 발효시키면 발아한다고 한다. 그리고 씨 2~3개를 넣고 물을 주면, 묘목이 자란다. 이렇게 18개월을 키우면 카카오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씨를 심지 않고 수확하여 건조하면 우리가 먹는 초콜릿 원료가 된다. 카카오 100%를 처음 맛보았는데, 당연히 맛있진 않았지만, 또 못 먹을 정도로 쓰진 않았다. 그렇게 카카오 반쪽을 혼자 다 먹으며 망고스틴 먹는 기분을 내며 농장을 구경했다.
카카오 재배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가격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킬로당 1,000 세파프랑이었던 카카오 원두가 올해는 1,800 세파프랑이라고 한다. 가격 상승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적 이유가 크다고 한다. 이는 카카오 재배가 코트디부아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전 세계 카카오 유통량의 40%를 공급하는 코트디부아르는 세상에서 가장 카카오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고, 카카오 재배는 GDP의 14%를 차지한다. 카카오 경작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구도 24%에 이르니, 10월에 있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카카오 재배 종사자들의 표심을 잡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년 대비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올랐음에도 여전히 카카오 경작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이는 정부가 한 해의 카카오 가격을 미리 결정하여, 농민들이 시장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에 카카오를 팔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카오를 경작하는 코트디부아르인들의 절반이 빈곤선 이하 생활을 하고 있다. 농민들의 빈곤은 적절한 비료 및 농약 사용을 가로막아 변화하는 기후에 알맞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고, 적절한 시기에 카카오나무를 자르고 새 카카오나무를 심는 과정을 더디게 한다. 결국, 낮은 카카오 가격은 카카오 수확량을 떨어뜨려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들의 생계수단인 카카오 재배는 산림파괴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기후변화는 농민 빈곤을 심화하는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된다. 한 세기 만에 코트디부아르 내 산림 90%가 파괴되었는데, 카카오, 캐슈너트, 팜유 경작지 확대를 위해 숲을 파괴한 것이다. 또한 카카오 재배를 위해서 코트디부아르에 아이들의 노동력이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프랑스엥포 기사에 따르면, 2020년에 800,000명의 아동이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대부분은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가족에 이끌려 노동하지만, 코트디부아르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부르키나파소인들이 인신매매로 착취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카카오는 코트디부아르에서 농산물 수출로 인한 경제 호황을 선사한 상징적인 작물이지만, 그 화려한 역사 뒤엔 농민들의 가난, 환경파괴, 노동착취 등 어두움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기구와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산림 혼합경영을 보급하며 카카오 생산량 증대와 지속가능한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다국적 기업이 아동 착취 문제를 심각히 여기고 있다고 하지만, 이 모든 문제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달콤한 과육과 초콜릿 너머에 있는 코트디부아르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카카오를 통해 맞닥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