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 생활과 물
언제부터 인간은 물가에 살고 싶어 했을까? 코트디부아르 아비장(Abidjan)이 아비장이라고 불리기 전, 아칸족(Les Akans)의 일파인 에브리에족(Les Ébriés)이 석호 주변에 모여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이 호수는 에브리에족의 라군(Lagune Ébrié)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곳에서 물고기를 낚고 항해를 했다. 에브리에족이 아비장에 터를 잡은 한참이 지난 뒤, 나도 이곳에 도착해 정착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젠 배보단 차를 이용하는 편이 더 편리했고, 식수와 생선은 호수가 아니라 마트에서 구하면 되었다. 달라진 삶의 방식에도 불구하고 석호를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석호의 범람을 대비하여 적당히 떨어져 있고 대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5층에 입주하여 매일 멀찍이 흐르는 호수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비장에서 물이란 단순히 테라스에 느긋하게 앉아 즐길 수 있는 종류의 무언가가 아니었다.
솟아나는 물은 대개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가뭄과 목마름을 해결하고 자연과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거실 바닥에서 물이 솟은 것이다. 물을 만져보았지만 따뜻하진 않았다. 온천이 터진 건 아니었다. 5층인 걸 고려해서 조금 더 현실적인 추측을 해보기로 했다. 혹시 천장에서 떨어진 건가,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물이 샌 흔적이 없었다. 일시적인 현상일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물을 닦았지만, 어느새 물은 다시 고여 있었다. 거실에 웅덩이가 생겼다는 걸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하자, 곧 이사 명령이 떨어졌다. 바닥을 다 드러내야 하는 대공사를 진행해야 하니 건물 안에 있는 빈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짐 싸기 귀찮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삿짐을 꾸려 4층으로 이사 갔다. 이사 간 집도 손님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사실을 관리실에 알리니, 우리 집 문제와 관계가 있는 듯하다고 하며, 다른 화장실을 쓰라고 조언했다. 그래도 이사한 집은 기존 집보다 두 배 이상 넓었다. 낯선 공간에서 느낀 어색함도 잠시, 친구들을 불러 생일 파티를 하며 넓은 공간을 만끽했다. 그동안 공사는 잘 진행되어 더 이상 5층에서 지하수가 솟는 일은 없었다.
물은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다. 몸을 씻는 행위는 신체적 청결은 물론이고 종종 영혼의 구원이란 의미로도 확장된다. 이러한 물의 상징적 의미는 널리 퍼진 지식이지만, 갑자기 물로 몸을 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당황스러움과 조급함 등의 다양한 감정은 경험으로 터득해야 했다. 어느 날 출근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간신히 몸을 옮겨놓고, 어제를 씻어버리고 오늘을 살 준비를 하는 성스러운 의식을 위해 수도꼭지를 위로 올렸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처럼 바짝 마른 화장실 바닥을 적실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순간 인생에 대한 비관과 거친 말들이 물 대신 쏟아져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부엌에서 생수병 몇 개를 가져와 머리에 들이부었다. 1.5L 2병 반으로 샤워할 수 있었다. 출근하면서 같은 건물 저층에는 물이 나왔다는 사실을 들었다. 5층에 사는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할까. 물도 매일 중력을 거슬러 5층까지 올라오는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점점 미쳐가는 게 분명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땐 다행히 물이 수고롭게 5층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기에 20개쯤 되는 생수병에 수돗물을 담기 시작했다. 넉넉히 물을 저장해 놓은 덕분에 이젠 반복되는 단수로 출근 전 물이 나오지 않아도 조급해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물은 일상에서 탈출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강과 바다를 지나 먼 곳으로 떠나거나, 바닷가로 피서를 떠나 물속으로 몸을 던지며 휴가를 보낼 수 있다. 그날도 지중해를 건널 생각에 퇴근길은 깃털보다 가벼웠다. 몇 시간 후면,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고 휴가를 떠날 생각에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집에 돌아와 짐을 마저 싸고, 저녁으로 먹을 짜파게티를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 함부로 옷가지 3개 정도를 세탁기에 넣고 돌려 집안일하고 가겠다고 생각하고 실행해 옮겼다. 짜파게티를 맛있게 먹고, 설거지를 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방울이 몇 방울 떨어졌고 이내 그것마저 그쳐버렸다. 그때 생각났다. ‘아, 빨래!’ 당장 세탁기가 있는 테라스로 나가보니, 이미 세탁기엔 에러가 떠 있었다. 물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작동을 멈춘 것이다. 이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얼마가 지났을까 부엌에 틀어 놓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졸졸 흘렀다. 그 물로 얼른 설거지하고 세탁기를 다시 작동시켰다. 하지만, 이내 물은 또 끊겼고, 공항 갈 시간은 점점 임박해 왔다. 그래서 잔뜩 물을 머금은 채 멈춰 있는 빨래들을 화분 위에서 물을 대충 짜고 실내 건조대에 던져 놓고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5층 집을 나오기 몇 달 전, 우리 건물에도 물탱크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단수가 되어도 물이 나온다는 뜻이었다. 왜 이제야 설치하냐는 불만과 함께, 이런 임시방편보다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부의 재원 부족과 인프라 노후화, 수원 오염, 도시 내 인구 급증으로 인한 수도 사용량 증가 등으로 당장 해결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SODECI(코트디부아르 수도 공급사)의 SNS 단수 공지를 확인하는 새로운 일상에 ‘빨래는 물이 나올 때 한다’, ‘항상 페트병 20병 정도는 물을 채워놓는다’ 등 원칙을 세우며 적응했다. 또한 단수의 불편함을 겪으며 물 공급 문제로 더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비장엔 수도 배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많은 가정이 있다. 이들은 민간 업체에서 물을 구매하여 정부 공급 수도 요금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지불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인프라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이로 인해 가계 경제가 더 나빠지며 그 결과 적절한 위생과 건강을 챙길 수 없는 상황에 쉽게 노출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 집에서 원할 때 언제든지 물이 나왔다면, 그들의 어려움은 실체가 아닌 통계수치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비장에서 물을 둘러싼 다양한 경험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때론 불편함이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을 타인에게 옮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