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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나갔어?

코트디부아르 전기 사용기

by gabin

예측 가능한 사회에선 쉽고 자세하게 계획할 수 있다. 집에서도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있고, 택배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예측가능한 사회인 대한민국에 살면서, 편리함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무릎이나 팔꿈치를 찍혀야 극심한 통증과 함께 느낄 수 있는 전기가 바로 그것이다. 견고한 전기 인프라의 소중함을 망각하고, 원할 때 언제든지 전기를 사용하는 행위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처럼 당연히 여겼다. 그러던 중 코트디부아르에서 지내면서 삶의 뒷무대에 있던 전기가 점점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살던 집엔 제자리를 찾지 못한 세탁기가 하나 있었다. 원래 부엌에 있었는데 집주인이 실내 공간을 넓게 쓰라며 테라스로 옮겼다고 했다. 호의는 마음에 들었지만,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세탁기 플러그 꽂을 콘센트가 없었다. 코트디부아르에 막 도착했을 터라 ‘코트디부아르 가정에선 세탁기 플러그 꽂을 다른 방법이 있나’라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건물 관리인은 멀티탭을 가져다주었다. 드디어 손빨래에서 벗어나 문명의 혜택을 누릴 생각으로 행복에 겨워 세탁 버튼을 눌렀다. 세탁기가 잘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집에 들어와 소파에 누워 아무 문제도 없는 삶의 순간을 만끽했다. 한 5분이 지났을까, 밖에서 불꽃놀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타다닥 타다닥 펑 펑’. 낮이었다. 그리고 고무 탄내가 났다. 빛의 속도로 테라스로 뛰어나갔다. 멀티탭이 타고 있었다. 멀티탭 코드를 빼야 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싶었지만, 집에 그런 건 없었다. 전선이 타고 있는데 마트에 다녀오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멀티탭 플러그 쪽은 타지 않았기에 운명을 신께 맡기고 맨손으로 코드를 뺐다. 그 순간보다 신의 존재를 확신한 때가 있었을까. 다행히 살았다. 타버린 멀티탭 사진을 관리인에게 보냈고, 전기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끝났고, 우리 집에서도 세탁기를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후에도 배수관을 제대로 연결하지 않아 5층 테라스부터 물이 밑으로 줄줄 샜다. 결국 다시 배수관을 배관에 연결하는 공사를 해야 했지만, 어쨌든 하나씩 좋아지고 있었다.

IMG_2042.HEIC 타버린 멀티탭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토요일 오전이 찾아왔다. 날씨가 유독 더워서, 점심 먹고 카페로 피신할 계획이었다. 밀린 빨래도 돌리고, 점심으로 먹을 밥도 안쳤다. 모든 할 일을 기계에 넘긴 후 소파에 눕고 싶었다. 작렬하는 햇볕을 막기 위해 더위를 시키고자 커튼을 치고 에어컨과 선풍기를 켰다. 소파에 누운 지 몇 분 되었을까, 습도와 온도가 제법 낮아졌다. 달달한 휴식을 본격적으로 만끽하려고 하자, 에어컨이 꺼졌다. 밥솥은 더 이상 쌀에 압력을 가하지 않았고, 세탁기도 멈춰버렸다. ‘아오, 또 정전이야.’라는 뜻을 가진 더 강렬한 말을 내뱉었다. 냉기가 실내에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지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전은 정전이 쉽게 나는 시간이 아닌데.’ 혹시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공용공간으로 나가보았다. 문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천장에 불이 들어왔다. 문제는 정전이 아니라 내가 전기를 순간적으로 너무 많이 사용한 것이었다. 전기의 과사용을 막아 환경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집은 르코르뷔지에보다 파리의정서에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내려간 두꺼비집을 다시 올리고 에어컨은 포기하고 선풍기만 틀어 밥 짓기와 빨래 돌리기를 완료할 수 있었다.


정전이 잦으면 사람 성격도 나빠지지만, 기계도 고장 난다. 인간은 이 불편한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수행하거나 어디로 도망가 버리면 되지만, 정전 날 때마다 냉장고를 데리고 카페를 갈 순 없는 노릇이다. 일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업무 중 한참 보고서 쓰고 있는데 전기가 나가는 순간은 더욱 끔찍하다. 모니터가 깜깜해지면 심장 한가운데가 마그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미치지 않기 위해선 무정전 전원 장치(UPS)가 필요하다. 정전 후 얼마간 전기를 공급해 주어 적어도 저장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치도 정전 공격을 수십 차례 받다 보면 어느 순간 하늘나라에 가 있다. 무정전 전원 장치를 보호하기 위한 전압 안정기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중요한 전자기기를 UPS에, UPS를 전압 안정기에 달고 나서야 안심한다. 그래도 정전이 나면 순간적으로 기계에 설치된 팬이 빨리 돌며 폭발할 거 같은 소리를 내는데, 기술자에게 물어본 결과 전류량이 바뀌어서 그렇다고 한다. 정전이 나면 또 사무실 밖 주차장에 있는 자체 발전기가 돌아가며 끊어진 전기를 공급한다. 얘도 힘든지 엄청난 양의 검은 연기를 내뿜는다.


전기는 일상에 들어와 무언갈 태우고, 또 순식간에 나가버린다. 일상에 불쑥불쑥 나타나 크고 작은 영향을 주는 전기와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전압에 맞는 멀티탭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잦은 정전으로부터 전자기기를 보호하는 법, 한 번에 전력을 너무 많이 쓰지 않는 법 등을 체득했다. 아껴 써도 2달 전기세가 8만 원이 넘어, 보지 않는 TV 전기 코드와 외출 전 와이파이 공유기 콘센트를 뽑는 습관이 들었다. 저녁에 운동하고 돌아오면, 종종 온 동네에 전기가 나가 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샤워하고 나와 소파에 누워 테라스 너머 깜깜한 동네 야경을 바라본다. 어느 때보다 차 소리는 크고 달은 밝다. 익숙했던 편리함과 멀어졌다는 불편함은 줄어들고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살아가는 법을 익혀간다. 물론 너무 덥고 습하지만 않는다면.


IMG_4106.HEIC 정전된 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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