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뜩 내가 타인과 다르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체감하지만, 해외에선 매 순간 경험하는 일상이 된다. 코트디부아르에서 도로변을 걷다가 유치원 하교 차량을 만나면, 버스 안 작은 생명체들의 수많은 눈은 나에게 고정되고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다.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쳐다보며 오두방정을 떠는 아이들이 귀여워 웃음이 터진다. 아이들이 자란다고 모두 이방인을 향한 호기심에서 벗어나는 건 아닌 듯하다. 상점 앞을 지날 때,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니하오”, “중국인” 등 말이 튀어나온다. 대부분 큰 악의 없이 관심을 끌려고 하는 행동이므로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면서 가던 길을 지나간다. 마음이 여유로운 날엔 '그래도 동아시아에서 온 걸 알아봐 준 게 어디냐'며 아시아인으로서 정체성에 관해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구이며 당신은 누구인가?’
정오쯤이었다. 길을 한참 서성이다가 젊은 택시 기사가 모는 차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차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기 전, 택시비를 흥정해야 했다. 그에게 얼마냐고 묻자, 현지인 요금의 1.5배 정도를 불렀다. 그래서 적정 택시 가격을 제시하며, 약간 거짓말을 보태 여기 오래 살았다고, 알 거 다 아는 사람이니 속일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피력했다. 하지만 그는 귀신같이 아비장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사실을 간파했다. “너 여기 오래 살았다면서 말투가 왜 그래?” 충분히 코트디부아르에서 숙성되지 않은 프랑스어 발음에서 외지인의 향기가 물씬 풍겼던 것이다. 마치 가방 속 깊이 숨겨둔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마약 탐지견 뺨치는 뜨내기 감별력에 허를 찔려버렸다. 당황하여 가격을 확실히 내려야 할 명분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우리 둘이 원했던 가격의 중간 정도로 타협하고 택시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이 일로 한국과 프랑스에서 배운 프랑스식 프랑스어가 택시비를 흥정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러던 중, 한 만화책에서 흔히 코트디부아르에서 길거리 프랑스어라고 불리는 ‘누시(le nouchi)’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표현이 뇌에 잠시 머물렀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운 좋게도 몇몇 표현들은 머릿속에 남아있길 선택했다. 그중 많이 썼던 표현은 ‘On dit quoi ?(옹 디 꾸아?)’이다. 직역하면 ‘뭐라고 말해?’인 이 표현은 코트디부아르에선 한국어의 ‘밥 먹었어?’ 정도로 안부를 물을 때 사용된다. 현지에 더 융화되고 택시비는 낮출 심산으로 하루가 멀다고 ‘On dit quoi?’를 외쳐댔다. 물론 현지어 한번 외쳤다고 만사가 형통하고 택시비를 아껴 부자가 될 순 없었지만, 많은 경우에 대화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 순 있었다.
전체 인구 중 80% 이상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를 믿는 코트디부아르에 이슬람 공휴일이 찾아왔다. 종교적 분위기가 가득한 그날에도 안부를 묻고 비용을 흥정한 뒤, 택시를 타고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기사님이 혹시라도 무슬림이면 휴일의 의미에 대해서 들어볼 요량으로 어떤 종교를 믿는지 여쭤봤다. 그는 투박한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 저는 애니미즘을 믿어요. » 자판기에서 이온음료는 눌렀는데 인공눈물이 나온 듯한, 예상을 뛰어넘는 답변이었다. 아브라함 계통 종교들이 코트디부아르에 유입되기 전, 애니미즘은 이곳 지역민들이 믿던 전통 종교였다면서 기사님은 자부심을 드러냈다. 프랑스 고등교육기관 시앙스포 자료(2017)에 의하면 코트디부아르에 무시할 수 없는(non négligeable) 비율의 애니미스트들이 있다고 한다. 2021년 인구총조사 결과,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국민의 2.2%가 해당 종교를 믿는다고 밝혔다. 그중 한 분을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며 만나 코트디부아르 종교에 관해 더 많이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다만, 무엇을 안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니다. 그때도 물론 물론 택시 안이었고, 혼자 쌀국수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택시는 정체 구간에 들어서자 지루했는지 기사님은 입을 열었다. 평범한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나 이제 발기가 되지 않아.” 깜빡이도 켜지 않고 1cm 앞으로 치고 들어온 차를 마주한 듯 머리가 쭈뼛 섰다. 미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묘안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때,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직업병이야.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생기는 문제지.” 이 두 문장으로 경계심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넌 중국인이니까, 좋은 약 많이 알잖아. 좀 추천해 줘.” 스릴러에서 비극과 코미디 사이 어딘가로 장르가 변경되었다. 사정은 딱하나 나는 그런 비슷한 문제도 결코 겪어본 적 없기에 미안하지만, 추천은 해줄 수 없다고 똑똑히 밝혔다. 추가로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한국은 저기 도로에 다니는 현대와 기아 차를 만드는 나라라는 설명과 함께. 그 후로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그는 이상하기보단 친절한 사람이었다. 기사님이 내 국적을 완벽히 틀렸지만, 그의 머릿속 중국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가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곳이라는 주장은 현실과 완벽히 부합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의 혈액순환이 빠른 시일 내에 원활해지길 기원한 뒤, 뜨끈한 쌀국수를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누군가와 온전히 같아질 순 없다. 너무나도 다르기에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걸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일상의 대화로 서서히 다른 존재들과 섞여가는 자신을 발견할 순 있다. 기사님이, 때론 내가 심심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로 현지 분위기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현지인들의 삶을 점점 더 높은 해상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타인에게 묻고,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행위의 중요성을 생각해 본다. 나를 드러내고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과 시간은 계면활성제 같아 이질적인 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섞임 속에서 삶의 지평은 점점 넓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커진 존재의 지평에서 펼쳐질 미래가 어떨지 약간 불안하기도 하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