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의 옛 수도, 그랑바쌈
뜨거운 햇볕이 살갗에 닿으면 두 가지 충동이 일어난다. 그늘로 피신하고 싶거나 태양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물론 더위를 피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무작정 작열하는 불 속으로 몸을 던지는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보단 강렬한 태양을 가장 잘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외부의 더위로 지친 내면은 수분을 충분히 섭취해도 가시지 않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광활한 물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렇게 무더운 어느 날 바다를 찾아, 코트디부아르의 경제수도 아비장에서 차로 1시간쯤 걸리는 그랑바쌈(Grand-Bassam)으로 향했다.
차가 점점 더 많은 야자수를 지나칠수록 그랑바쌈에 가까워졌다. 도시에 도착했을 때 잠깐 차를 세워 공예품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가면, 거울, 나무로 조각된 문 등을 바라보며, ‘바쌈’이라고도 불리는 그랑바쌈이 얼마나 긴 시간을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프랑스령 코트디부아르의 첫 수도였던 이곳은 프랑스인들이 오기 전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이 도시의 원주민은 가나에서 온 아칸족(les Akans)의 일파인 응지마족(les N’zima)과 아부레족(les Abouré)이다. 이 중 누가 먼저 이곳에 터전을 잡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두 민족집단 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승은 그랑바쌈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아부레족에 따르면 바쌈(Bassam)은 ‘밤이 왔다’라는 의미를 지닌 ‘알쌈(Alsam)’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들은 밤이 오면 코모에 강(fleuve Comoé) 하구에서 야영을 했는데 이 야영지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응지마족의 구전에 의하면 바쌈은 ‘내가 짐을 드는 것을 도와주세요.’라는 표현인 ‘바주암(Bazouam)’에서 왔다고 한다. 응지마족이 행상 활동이 활발했던 민족 집단임을 잘 보여주고, 15세기부터 이들이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 활발히 상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밤이면 야영하는 아부레족, 강 유역에서 활발히 상거래를 하던 응지마족이 활동했던 시대를 떠올리며, 그들의 땅이었던 그랑바쌈이 프랑스로 넘어간 시점에 건설되었던 ‘프랑스 지구(Quartier France)’에 도착했다.
대서양과 울라딘 석호(lagune Ouladine) 중간에 끼어있는 프랑스 지구는 많은 식민 시절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구역에서 첫 일정으로 미술관 겸 카페에 가기로 했다. 찌는 더위를 뚫고 도착했지만, 갤러리는 문이 닫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열어보니 꿈쩍 하지 않았다. 안타까움을 감추기 위해 안경을 벗고, 선글라스로 갈아 끼고 안경은 단추를 두 개 푼 셔츠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발길을 대서양으로 틀었다. 바다와 야자수가 보이기 시작하며 대양을 마주한다는 기대에 가득 찼을 때, 발은 모래에 푹 빠졌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햇볕에 하루 종일 달궈진 모래는 왜 진작 유리가 되지 않았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고, 쪼리를 신어 발가락 사이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미친 듯이 오두방정을 떨며 바다로 향했다. 다행히 1도 화상을 살짝 넘는 정도에서 끝났고, 생활에 지장은 없었다. 대서양의 파도는 엄청났지만, 그 파도를 뚫고 해수욕을 즐기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해안을 따라 거침없이 치는 규모 있는 파도들을 보며 해방감을 느꼈다. 바다의 끝자락에서 잠시 발을 담그며 나름대로 해수욕을 즐겼다. 하지만 마음이 즐겁다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바다에서 나와 차로 돌아가며 고개를 숙여 셔츠를 바라보았다. 안경이 사라졌다.
그새 녹아버린 걸까. 왔던 곳을, 심지어 내 발을 지옥 불처럼 태우던 모래밭을 다시 건너며 안경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굳게 문이 닫혀 있던 갤러리 겸 카페 앞에서 땅에 떨어져 있는 안경을 발견했지만 내가 거라고 우기기엔 골동품에 가까웠다. 흐린 눈을 선글라스로 간신히 교정하여 오래된 건물들을 지나, 다시 울라딘 석호 쪽으로 돌아와 강변 카페로 들어가 탄산수를 마셨다. 거대한 나무 밑이었기에, 선글라스를 벗고 석호를 바라보았다. 일상을 벗어나 잠시 쉬러 왔는데 굳이 모든 걸 자세히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린 강, 그 너머에 있는 마을을 바라보며 잠시 여유와 자유를 느끼며 안경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다. 살짝 흔들리고 뿌옇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안경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하기엔 그랑바쌈은 너무 많은 일을 겪은 도시였다. 1842년 프랑스군이 상륙하고 그랑바쌈의 왕 블레 피터(Bley Peter)와 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으로 그랑바쌈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고 느무르 요새(Fort Nemours)가 세워진다. 그랑바쌈을 시작으로 코트디부아르의 전 국토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따라서 바쌈은 프랑스 식민지의 행정,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다. 1893년부터 1899년까지 수도였던 그랑바쌈에 황열병이 엄습했다. 열대지방의 열병은 유럽 정착민 60명 중 45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900년 수도는 첫 프랑스 총독 이름 ‘방제(Binger)’을 딴 방제빌(Bingerville)로 이전했다. 이후에도 중요한 항구로 역할을 하다가 신흥 항구 도시이자 현재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수도인 아비장에 운하가 개통되며 주요 항구 자리를 내어준다. 코트디부아르의 중심지로 많은 유럽인과 서남아시아 이주민들이 모여들었다. 1949년 식민당국의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인사 강제 구금 사건으로 일어난 여성들의 행진(Marche des femmes sur Grand-Bassam)은 코트디부아르 정체성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카페에서 잠시 일상과 떨어져 여유를 즐기다가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인기가 많은 식당이었기에 테이블에 앉기 위해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오래 서 있다 지쳐 바에 잠시 기대고 서 있었는데, 한 중년 남성이 바로 와서 바텐더와 이야기하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무료함을 달래고자 그에게 말을 걸었다. 순조로웠던 대화는 그새 길게 자란 내 머리카락에 대한 칭찬에 다 달았고 이를 기점으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저씨는 갑자기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서 점점 더 팔을 과감하게 터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금 내가 이성애자라는 확신이 들게 했고, 나는 더 이상 그와 대화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의 대화는 썩 좋지 않게 끝이 났지만,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그랑바쌈 전통사회를 성별을 매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7 가문으로 이루어진 응지마족은 중심엔 남성인 왕이 있다고 한다. 전통사회의 지도자는 남성이지만, 누가 왕이 될지 선택하는 이들은 여성이라고 한다. 왕위는 주로 왕의 형제나 조카들이 물려받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습을 통해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있는 그랑바쌈의 사회 일면을 발견했다.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한 식민지 시절 지어진 건물을 구경하며 그랑바쌈 여행을 마무리했다.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 지어져, 1920년에 레바논-시리아계 상인, 가나메(Ganamet)가 구매하여 서남아시아의 스타일이 가미된 건축물이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프랑스풍 식민지 건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구역의 건물은 여전히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지만, 훼손의 정도가 심각했다. 사람들도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열대와 시간의 풍파를 견디기 힘겨운 듯했다. 그렇게 그랑바쌈의 이름과 얽힌 이야기들을 접하고,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한 뒤, 한때 코트디부아르에서 최고로 융성했던 항구를 밝히던 등대를 뒤로하고 다시 아비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눈앞은 흐렸고, 멀리서 해는 마지막 빛을 짙게 토해내고 있었다.
참고자료
https://whc.unesco.org/en/list/1322/
https://levoyageducalao.com/visiter-grand-bassam-quartier-france/
https://www.villedegrandbassam.ci/histoire.php
https://levoyageducalao.com/visiter-grand-bassam-quartier-nzima/
https://rezoivoire.net/ivoire/patrimoine/4354/breve-histoire-de-grand-bassam.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