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몇 년 전, 한 한국인 작가가 영국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을 티비 프로에서 털어놓아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런던을 여행하던 작가는 90세가 넘어 보이는 영국인 노부부에게 유창한 영어로 길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노부부는 작가의 친절에 고마워하며, 글쎄 이런 질문을 던졌단다. “영어를 참 잘 하시네요. 동방식민지(Oriental Colony)에서 오셨나요?”
작가는 순간 머리가 띵했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노부부가 지난 50년간 세상이 변한 걸 모를 수 있겠다싶어 다시 친절하게 자신은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얘기해주었단다. 그러자 노부부는 이번에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럼 서부식민지(Western Colony)에서 오신 건가요?” 누가 봐도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작가가 허언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100%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위의 일화는 한국인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식민지의 ‘상처’를 안고 있는 입장으로서 그네들의 오만이 눈꼴시럽지만, 한편으로는 전 세계를 발밑에 둔 양 의기양양한 그 자신감이 부럽기도 한 것이다. 내가 곧 세계요, 보편이라는 저 여유야말로 진정 ‘제국’의 품격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들어 영국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전혀 ‘제국’답지 못하다. 외국인 들어오는 게 싫다고 기껏 EU에서 나가기로 해놓고는, 3년이 지나도록 어떻게 나갈지를 합의하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며 옥신각신하는 의원들을 보노라면 저곳이 진정 의회민주주의의 본고장인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편견으로 똘똘 뭉친 영국인들은 자신감 넘치는 코스모폴리탄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떠는 촌뜨기 같고 말이다. 제국의 위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영국은 세계를 호령하던 대제국에서 보잘것없는 섬나라로 되돌아간 것일까?
영국사 연구자인 이영석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전 세계 사람들을 자기네 식민지인으로 생각하는 오만한 영국도, 외국인에 의해 ‘영국다움’이 상처를 입을까 불안에 떠는 영국도 다 ‘제국’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의 책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이 주목하는 건 바로 영제국의 이러한 복잡함이다. 영제국을 만든 건 체계적인 계획이나 앵글로색슨의 ‘위대한 사명’이 아니라 우연하고도 정치적인 일련의 사건과 계기였다. 세계각지에 산재한 제국의 ‘신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방대한 네트워크에 몸을 맡겼고 말이다.
저자는 영제국의 형성과 팽창, 해체의 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하는 한편, 제국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책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부분은 1부 <19세기의 유산>이다. ‘신사 자본주의’와 ‘재정-군사국가’라는 키워드로 영제국의 형성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생적인’ 근대화에 실패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산업혁명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강한 로망을 품고 있는 듯하다. 산업혁명이라는 ‘빅뱅’은 서구세계에 미증유의 풍요와 가공할 파괴력을 선사했으며, 비서구가 끝내 서구에 굴복한 이유 역시 산업혁명의 유무에 기인한다는 게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의 생각일 것이다.(심지어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역사만화가 굽시니스트조차 이러한 산업혁명 이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일군의 연구자들은 산업혁명이 과연 ‘혁명’이라 불릴 만큼 급격한 변화였는지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새롭게 산출한 거시경제지표에 따르면 산업혁명기의 경제성장률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낮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산업혁명기에도 여전히 전통적 부문이 경제를 주도했고, 새로운 발명과 기술혁신은 “전통의 바다에 떠다니는 한 작은 근대적 부문”에 불과했다고 일갈한다.(자세한 내용은 이영석의 『삶으로서의 역사』를 참고하길!)
산업혁명이 그렇게까지 ‘혁명’적이지 않았다면, 영제국의 팽창을 가능케 한 요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바로 대토지를 소유한 젠트리(신사)의 이윤추구였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영형 부농’의 범주에 속할 영국의 젠트리는 일찍부터 자본제적 지대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다. 이들은 시장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불려갈 줄 아는 탁월한 자본가였지만, 끝까지 일상적인 노동세계를 멀리하고 여가와 아마추어 정신을 중시했다. 이처럼 근면한 노동이나 적극적인 기술개발이 아니라, 자본의 투자와 임대수익으로 부를 일구는 경제활동이 바로 ‘신사 자본주의(Gentlemanly Capitalism)’다.
16세기 이래 상업적 농업의 발전과 17세기말~18세기 초 일련의 금융혁명을 거치며 귀족과 젠트리는 이전보다 더 막대한 부를 쌓아갔다. 여기에 런던 상인과 금융가들이 합세하여 영국에선 지배적 자본가 집단으로서 ‘신사적 자본가층’이 등장한다. 이들 신사적 자본가층의 주된 투자처는 당시 밥 먹듯이 전쟁을 벌이며 ‘재정-군사국가’의 길을 걷고 있던 영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기존의 재정-군사국가는 과도한 재정지출이라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세기 중엽까지 ‘글래드스턴주의’로 알려진 일련의 재정건전화 정책이 실시된다. ‘글래드스턴주의’는 국채 시장을 축소하고 ‘연줄’을 이용한 사업을 어렵게 했다는 점에선 신사적 자본가층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국내에서 ‘껀수’를 찾을 수 없게 된 신사적 자본가층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백인 자치령에 대한 투자를 시작으로, 런던의 금융자본가와 투자자들은 정교한 상거래 기법과 견고한 화폐제도를 무기삼아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해갔던 것이다.
이처럼 신사적 자본가층의 활약에 힘입어 영국은 제국으로 도약했고, 그 형태는 청나라나 오스만 튀르크 등과 달리 광대한 대양을 잇는 네트워크에 가까웠다. 케이프타운, 지브롤터, 수에즈 운하, 아덴, 싱가포르, 홍콩, 밴쿠버, 포클랜드 등 세계의 주요 해양거점이 영국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전 지구적 연결망의 중심인 런던은 식량과 고업 원료의 중계지로서, 세계 투자 자본의 처리기지로서 은행·투자·해운·해상보험·도매무역·중개업 등 무수한 서비스 부문을 창출했다. 제국의 엔진은 ‘세계의 공장’ 맨체스터가 아니라 ‘세계의 상점’ 런던이었다.
그러나 면이 아닌 점과 선의 연결을 통해 느슨하게 유지되는 제국의 지위란 근본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존 다윈이 적절히 지적했듯, 19세기 영제국의 평화와 번영이란 “수동적인 동아시아,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그리고 강력하면서도 비호전적인 미국”이라는 절묘한 국제정세 속에서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독일이 유럽의 균형을 무너뜨리려 할 때, 미국이 넘치는 에너지를 바깥으로 발산하려 할 때, 일본이 영국의 주니어 파트너라는 수동적 지위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영제국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한때는 영제국 팽창의 원동력이었던 신사 자본주의 역시 20세기에 들어와선 외려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품위 넘치는 젠트리의 이상에 집착했던 기업가들이 테일러주의나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의 새로운 생산방식을 받아들이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 대다수가 가족기업 형태로 운영되었기에 전문 관리자층을 양성하거나 기술교육을 제도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을 보전했던 영제국은, 1956년 수에즈 위기를 기점으로 급속히 해체되고 만다. 그나마 대륙의 프랑스나 포르투갈과 달리 ‘질서 있는 퇴진’이었다는 점이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랄까?
영국인들에게 제국의 해체는 식민지배라는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찬란한 옛 영광과의 쓰라린 작별이기도 했다. 이 복잡 미묘한 감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제국의 경험이 역사연구의 주제로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역사가의 전문적인 분석이든 개인의 미시적인 기억이든 간에 영제국에 대한 인식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데이비드 캐너다인은 영제국이 인종적으로 불평등하다기보다는 신분적으로 불평등한 제국이었다고 지적한다. 영제국의 지배자들은 복잡하고 중층적인 자국의 신분체계를 식민지의 사회위계와 직접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영국의 귀족과 젠트리는 백인 노동자보다는 인도의 제후에게 훨씬 친밀감을 느꼈고, 이들 식민지 토착세력에게 각종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제국의 정체성을 공유했다. 캐너다인은 이러한 경영방식을 ‘장식주의(ornamentalism)’라고 부르는데,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을 의식한 표현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례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19세기의 역사가 존 실리는 미국과 러시아 같은 대륙세력에 맞서 영제국을 연방연맹으로 재편할 것을 부르짖었지만, 연방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백인 자치령뿐이었다. 인종주의자 실리는 인도가 영국과 문화적 공통성이 없기에 ‘대영국’에서 배제되는 편이 낫다고 단정 지었다. 비단 백인자치령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수준을 넘어, 이들이야말로 외국인에 의해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잉글랜드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한국에도 북조선 여성에게서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누이’의 모습을 보았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남성분들이 계시니 원!) 누군가에게 영제국의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백인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제국은 다인종 귀족들이 지배하는 코스모폴리탄적 제국이었던 한편, ‘잉글랜드다움’을 숭상하는 백인만의 제국이기도 했다. 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네트워크의 일부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종, 젠더, 신분, 계급에 따라 제국을 다르게 이해하고 기억했을 터다. 하지만 책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부족하다. 물론 저자의 말마따나 영제국의 경험과 기억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상상해 본다. 스스로를 ‘인도를 다스리는 마지막 영국인’이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열렬한 내셔널리스트였던 자와할랄 네루에게 영제국은 무엇이었을까? 전형적인 영국식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면서도 (그것이 독재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을지언정) ‘아시아적 가치’를 신봉했던 리콴유는? 아니 이런 엘리트들 말고, 보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가령 1963년 이후 케냐 정부의 ‘아프리카화’ 정책으로 영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인도계 아프리카인들 말이다. 스코틀랜드나 웨일즈처럼 ‘브리튼인’이지만 ‘잉글랜드인’은 아니었던 사람들, 퀘벡의 프랑스어 화자들, 평생 고향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잉글랜드의 시골뜨기까지, 영제국의 기억은 어쩌면 사람 수만큼이나 다채로울지도 모르겠다.
지난 1월, 저자는 페이스북에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을 끝으로 새로운 주제를 찾아 자료를 모으고 학술논문을 쓰는 작업은 이제 그만두겠다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역시 아쉽다. 이 책은 그간 저자가 걸어온 여정의 화려한 피날레라기보다는, 이어질 연구의 위대한 서막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제국의 형성과 팽창, 해체를 꼼꼼하게 분석한 이 책을 주춧돌삼아 본격적으로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을 탐구해주십사 부탁드리는 건, 아무래도 너무 무리일까? 글쎄, 20대 젊은이를 겸허하게 만드는 저자의 성실함과 학문적 열정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 한 작업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