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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May 16. 2019

우리에겐 여전히 서점이 필요하다

『세계서점기행』

 책벌레를 자임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인생서점’ 한 곳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겐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책을 고르던 공손서점과 대학생이 된 지금 종종 들르곤 하는 홍익문고가 바로 그곳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 빠르면 당일에도 받아볼 수 있는 오늘날 구태여 서점을 찾는 이유는, 서점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끈따끈한 신간의 제목을 훑노라면 왠지 지(知)의 최신 트렌드를 꿰뚫은 기분이고, 이름 모를 책에 푹 빠져있는 누군가의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단골들의 취향을 꿰고 있는 서점 직원과의 수다도 빠질 수 없다. 

베이징의 완성서원. 서점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에 우리는 서점을 찾는다.

 서점이 선사하는 이러한 즐거움은 그러나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서점 자체가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신촌의 랜드마크이자 수많은 대학생의 안식처였던 홍익문고는 2012년 신촌 일대가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며 철거위기에 놓였다. 다행히도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홍익문고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위세는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홍익문고는 서점이 곧 건물주인, 굉장히 예외적인 사례다.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절대다수의 서점들은 시민들이 채 손을 쓸 틈도 없이 쫓겨나고 말았다.

 서점에게 미래는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는 세계 각지의 서점을 찾았고, 그 기록을 묶어 『세계서점기행』을 냈다. 저자는 유럽과 미국, 동아시아의 서점들을 순례하며 여전히 꿈틀거리는 인문정신의 생명력을 느낀다. 800년의 세월을 품은 고딕성당을 개조해 만들어진 네덜란드의 도미니카넌 서점, 수많은 예술가를 키워낸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1989년 톈안먼 광장의 자유·저항정신을 이어가는 베이징의 완성서원, 어린이와 여성, 환경을 귀히 여기는 세상을 꿈꾸는 도쿄의 크레용하우스까지, 세계의 서점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읽기의 가치를 전파하고 있다.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저자가 찍은 서점들의 사진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으리라.

고딕 성당을 개조해 만든 네덜란드의 도미니카넌 서점.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독립서점 미드타운 스콜라를 꾸려가는 에릭 파펜푸세와 캐서린 로런스 부부가 건네는 이야기는 짧지만 뼈가 있다.

“독립서점은 대를 이어 운영하기가 쉽지 않아요. 정신노동이자 육체노동이거든요.”

 그렇다, 서점운영은 육체적으로 매우 고될 뿐 아니라 정신을 좀먹기까지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현실에선 더더욱! 지식을 얻는 수단이 문자매체에서 영상매체로 옮겨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책을 펼치기보다는 유튜브를 검색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무턱대고 서점 문을 닫지 말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인문정신의 토양인 서점을 지켜나갈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에릭 파펜푸세와 캐서린 로런스 부부. 서점운영은 정신노동이자 육체노동이다.

 뜬금없겠지만, 서점을 좀먹은 정보통신기술이야말로 결국 서점을 되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언호 대표가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한 정보통신기술이 서점을 되살린다니,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힌 도미니카넌 서점을 폐점위기에서 구해낸 것도 4000명 넘는 페이스북 회원들이었다. 뉴욕의 맥널리 잭슨 서점이 제작해주는 ‘나만의 책’은 구글에 의해 데이터베이스화되어있고 말이다.

 1997년, 프랜시스 케언크로스는 『거리의 소멸』이란 책에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사람들이 얼굴을 맞댈 필요성을 사라지게 하리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클릭 한 번으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음에도 굳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굳이 따지자면 대체재라기보다는 보완재다. 나 역시 SNS를 통해 새로 나온 책이나 유명 저자의 강연회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한다. 한길사가 운영하는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이나 과학전문서점 <갈다>, 인문사회서점 <니은책방> 또한 인터넷 공간을 통해 저자와 독자의 만남을 주선하고, 각종 강연과 전시를 홍보하고 있다. 

 오늘날 서점이 처한 현실은 분명 좋지 않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점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방법은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타듯 ‘온라인’을 이용해 ‘오프라인’에서의 만남과 소통을 이어가야 한다. 

베이징의 싼롄타오펀 서점. 함께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

 상하이의 명문서점 지펑을 창립한 옌보페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서점이란 시대정신이 자유롭게 표출되는 공간이다. 서점이란 태생적으로 시민사회다.”

 서점은 본래 출판사이자 살롱이었고, 사람들은 이 복합적인 문화공간에서 온갖 불온한 생각을 공유하고 연대의식을 키워갔다. 옌보페이의 말마따나 서점은 고립적인 ‘개인’과 경직된 ‘국가’ 사이에 놓인, 자유롭고 비판적인 ‘시민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매개였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사회 각 분야가 전문화되며 서점은 순수하게 책만을 파는 공간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를 내다보는 지금, 서점은 오히려 출판사이자 살롱이었던 옛 시절을 적극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에겐 여전히 서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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