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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May 19. 2019

털보 관장님의 유쾌한 과학 대모험!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건대, 나의 꿈은 언젠가 역사SF를 쓰는 것이다. 왜 하필 역사SF냐고 묻는다면 글쎄, 내가 역사 전공자고 SF를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물론 역사소설보다는 역사SF가 그나마 팔릴 것 같아서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바로 내가 과학에 젬병이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수학은 문과치고 그럭저럭 해내는 수준이었지만, 과학은 문과 중에서도 못하는 축에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이후 과학과는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의 마인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역사SF를 쓰고 싶어지다니, 이를 어이할꼬!

 이렇게 성인이 되고서야 과학에 관심이 생긴 문송이(문과라서 죄송한 사람)가 나 뿐만은 아닐 게다. 어떤 문송이는 나처럼 과학을 소스로 소설을 쓰거나 웹툰을 그릴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늘 음식물쓰레기 버리듯 휙 넘겨버리던 신문의 과학면을 한 번 진지하게 읽고 싶어진 문송이도 있을 터다. 사실 남들 앞에서 자랑하기 위한 지적 악세사리로서 과학 지식을 탐하는 문송이가 제일 많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니까.

  물론 뒤늦게 과학에 재미를 붙여보려는 우리 문송이들에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과학과 담쌓고 지내온 기간이 너무 길어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가 선정한 과학고전을 펼쳤다간 그날로 과학과 영영 이별할지도 모른다. 불쌍한 문송이들에게 필요한 건 과학에 대한 흥미를 돋울 수 있는 좋은 교양서건만, 서울대는 우리 마음도 몰라주고 『프린키피아』나 『종의 기원』 따위를 추천해주고 있으니 원! 세상은 과학 좀 공부해보려는 문송이들에게 이토록 잔인하다.

 하지만 문송이들이여, 이제는 울지 마라! 징징대지도 마라! ‘과알못’이라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교양서가 나왔으니, 바로 이정모의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이다. 저자 이정모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유명한 ‘과학 커뮤니케이터’지만, 나는 그를 고3시절 <미생>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미생>에 등장하는 재미교포 스티브 한의 모델이 바로 이정모였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대한민국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도 그의 프로필을 검색해보고 처음으로 알았다. 이런 중증 ‘과알못’이 강추하는 책이니, 얼마나 쉽고 재미있겠는가!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은 저자가 읽은 각종 과학책에 대한 서평 모음집이지만,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외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 이것은 서평인가 신변잡기인가?” 책 뒤표지에 실린 추천사에 나와 있듯 이정모의 서평은 전적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이 키우는 앵무새가 자신을 싫어해 딱 한번 과외를 짤렸다며 분해하고(「새대가리 vs. 새의 천재성」), 동생이 유치원에서 사람의 소화기관에 대해 배우는 것을 본 이후로 유치원 졸업생에 대한 열등감을 키워왔다고 고백한다.(「‘침, 균, 똥’의 숨겨진 과학」) 

 뿐만 아니라 저자는 시도 때도 없이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홍보하고, 자신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쳐준 종로학원의 신일생, 조용호 선생님에 대한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책에서 종로학원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나는 끝내 선생님들 성함을 외워버리고야 말았다. 누구라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알아버린 기분이 들 것이다. 만약 길에서 저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삼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하고 반갑게 손을 내밀 것만 같다.

 이처럼 이정모는 본디 ‘남’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 쓰인 서평이란 글에서 ‘나’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누군가는 과연 저자가 서평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지 의문스러울 것이고, 저자의 TMI에 지레 부담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정모는 매우 훌륭한 서평가일 뿐 아니라 독자를 부담스럽게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의 서평이 훌륭한 이유는 다름 아닌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형식 덕분이다.

 이정모는 책의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서평을 갈음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이 보고, 배우고, 느낀 온갖 것들을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책을 읽어간다. 저자가 책과 함께 웃고, 울고, 짜증내고, 위로받은 생생한 기록은 딱딱한 과학책에 개성을 불어넣는다. 

 게다가 이정모의 경험담은 단순한 ‘썰풀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학책을 소개하기 위한 ‘밑밥깔기’다. 이를테면 아버지를 모시고 브뤼셀을 여행하다 자동차로 왕궁 후문을 가로막은 이야기를 꺼내나 싶더니, 스리슬쩍 우주를 탐구해온 과학의 역사로 넘어가버리는 식이다.(「“You are here!”」) 그 솜씨가 마치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기에, 과학책은 처음이라며 쭈뼛대던 문송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너무나도 재밌다. 난 지금껏 이렇게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글쟁이는 만난 적이 없다. 도서관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틈날 때마다 이 책을 펼쳐든 지난 사흘간 나는 정말이지 꼴사납게 쿡쿡댔다. 급기야 왜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예민하게 신경 쓰면서 ‘물리적 올바름(physical correctness)’은 고려하지 않느냐는 대목에서는(「‘물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공교롭게도 둘 다 약어가 PC다!) 저자는 이렇게 남을 웃겨놓고선 뻔뻔스럽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본론으로 넘어가버린다.

 이렇듯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재기발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까지 가볍고 얄팍한 건 결코 아니다. 저자는 짧은 지면을 요령껏 활용해 각 책의 내용을 충실히 소개할 뿐 아니라, 상식을 뒤흔드는 촌철살인 역시 야무지게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77개에 달하는 알찬 서평은 저마다 다루는 내용도, 꺼내드는 질문도 제각각이라 독자가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결국엔 하나로 수렴한다는 사실이다. 

 이정모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과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인간은 그리 합리적이지도 않고, 복잡한 현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다.(「파수꾼의 딱따기 소리」) 그런 주제에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은 큰지라 과학자든 교회학교 교사든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 걸 이상한 설명을 갖다 붙이기 일쑤다.(「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하는 방식’으로서의 과학이 중요하다. 그 어떤 ‘사실’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되, 어디까지나 주어진 자료를 근거로 이야기한다.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되, 모든 걸 다 설명하겠다는 오만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만 ‘예정된 파국’을 그나마 슬기롭게 해쳐나갈 수 있다. 유머와 위트 사이를 도도히 흐르고 있는, 저자의 일관된 주제의식이다.

 저자에게 개인적인 고마움을 전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과학책에 대한 서평이 아닌 글이 딱 한 편 있으니, 바로 「나는 오늘도 ‘주례사’ 서평을 쓴다」이다. 자신이 책의 장점만을 다룬 ‘주례사 서평’을 쓰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 글은, 역시 ‘주례사 서평’을 지향하는 내게 너무나 큰 위안을 주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남의 장점을 잘 보는 사람은 단점 역시 귀신같이 알아챈다. (일단은 내가 그렇다!) 이정모 역시 웃으면서 뼈 때리는 몇몇 구절들로 미루어 볼 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눈물콧물 쏙 빼놓을 신랄한 비판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주례사 서평’을 고집하는 이유는, 시간과 지면의 한계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나마 좋은 과학책을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은 요즘 정말로 책을 읽지 않는다. 글을 통째로 외우던 음유시인들이 금속활자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갔듯, 종이책 읽는 사람들도 유튜브로 인해 ‘멸종’해버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어나 일어,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 화자라면 더더욱! 

 현실이 이토록 처참한지라, (번역서를 포함해) 한국어로 쓰인 괜찮은 책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설령 책에 사소한 단점이 있다 해도 일단 사람들이 읽어야 이에 대해 얘기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은 책이 널리 읽히는 게 먼저다. 책의 단점은 내게 개인적으로 질문이 들어올 때 얘기해줘도 늦지 않다. 요즘 들어 내 서평이 지나치게 호평 일색은 아닌가싶어 고민스러웠는데, 저자 덕에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도 열심히 ‘주례사 서평’을 써서, 언젠가는 『역사책은 처음입니다만』이라는 제목으로 ‘주례사 모음집’을 퍼내겠다! 물론 그때까지 한국 출판시장이 버텨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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