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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May 26. 2019

이토록 발랄한 고대

『역적전』, 그리고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송나라 이후를 중국의 ‘근세’로 여기는 독특한 사관을 제시한 근대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 나이토 고난은 1921년 어느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대체로 오늘날의 일본을 알기 위해 일본 역사를 공부할 때,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1467)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전의 일은 남의 나라 역사와 같은 정도로만 느껴지지만, 오닌의 난 이후는 참으로 우리들의 몸과 직접 닿아 있는 역사입니다. 이를 정말로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일본 역사는 충분하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以文會友(https://blog.naver.com/zentaur/220968438393)     


 과거는 낯선 나라다. 동아시아에서 소위 ‘전통’이라 불리는 풍습과 문화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봤자 18세기 이후에야 등장한다. 사실 이 ‘전통’이 과연 현대 한국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물며 그보다 앞선 시대임에랴! 

 냉정히 말해 1500여 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지금의 우리와는 개미 눈곱만큼의 관련도 없다. 아직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약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다면...’하는 망상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지만, 이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의 일이다. 온갖 억지와 비약을 무릅쓰고 고구려가 1000년을 더 이어갔다고 가정한들, 그냥 대동강-원산만 이남으로 축소된 한반도 위에 일본 같은 나라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짧게 잡으면 20세기, 아무리 길게 잡아도 18세기 이전의 역사는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생각하는 게 편할 정도로 우리와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근세 이전의 역사가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역사를 잘못 공부해온 것이다) 

 그다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흔히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들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만)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역사가 ‘거울’일 수 있다면, 그건 현재가 얼마나 우연적이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나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가장 진보한 시대’도 아니요, ‘보편’도 아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얼마든 그럴 수 있다. 오늘날을 상대화할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역사를 공부하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다. 

 특히 지금과는 데면데면한 시대의 역사일수록 거울로서의 쓸모가 커진다.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특수성’을 더욱 쉽게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일수록 느끼고 배우는 게 많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만일 이러한 역사의 즐거움을 아직껏 느껴보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곽재식의 역사소설 『역적전』을 펼쳐보시라. 광개토왕이 무위를 떨치던 시기의 다라국(多羅國: 지금의 경상남도 서북부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내가 지금껏 마주한 거울 중 가장 아름답게 반짝인다.     


 『역적전』은 구체적인 줄거리보다는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의미를 갖는 소설이다. 듀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전 한국 정통 사극이라는 장르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려고 했었어요. 그리고 그 문제점이 어떻게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제점과 연결되는지도 설명하려 했지요. 하지만 공부가 짧았고 시간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관심이 충분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곽재식은 이 주제에 대해 저보다 더 깊이 생각했고, 그 결과물을 이 책에 반영했습니다.”     

듀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中     


 듀나가 이야기한 ‘한국 정통 사극’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는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용의 눈물》과 《태조 왕건》에서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소위 ‘정통 사극’이라 불릴만한 작품들은 언제나 남성영웅의 이야기였다. 수염 기른 마초 몇 명이 폼 잡고 멋들어진 대사 하나 읊어주거나 뜨거운 눈물 좀 흘려주면 모든 일이 뚝딱 해결되곤 했다. 세상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닐 터이거늘, 남성영웅의 희로애락에 따라 모든 사람이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인다. 특히 삼국시대 전쟁물의 서사는 라노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인 ‘이고깽(이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친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통 사극’의 대안으로 등장한 ‘퓨전 사극’은 남성영웅에 맞췄던 초점을 (어디까지나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렸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퓨전 사극’의 남녀 주인공은 그냥 용인 민속촌을 방문한 2019년 대한민국의 20대 커플 같다. 가끔 방송사고로 18세기가 배경인 사극에 21세기 장비가 등장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퓨전 사극’의 경우엔 그냥 대놓고 21세기 장비를 써버리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퓨전 사극’의 남녀 주인공은 지극히 21세기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한다.

      

 곽재식은 ‘정통 사극’처럼 역사를 ‘남성영웅 깽판물’(남영깽?)로 만들어버리지도, ‘퓨전 사극’처럼 21세기 사람을 그려놓고 5세기 사람이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역적전』의 시대적 배경은 광개토왕이 한반도와 남만주를 주름잡던 4세기 말~5세기 초지만, ‘인물’로서의 광개토왕은 그리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사건의 전개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태풍과도 같은 자연재해에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역적전』의 광개토왕은 마치 《모노노케 히메》의 시시가미(사슴신) 같은 존재인 것이다.

 자연재해의 위치로 물러난 남성영웅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사가노와 출랑랑은 각각 백제 머슴 출신의 요리사와 가야 귀족 출신의 칼잡이다. 역적질을 일삼았다는 명목으로 끌려온 사가노와 출랑랑을 심문하는 하한기는 가락국 태생으로,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다라국으로 도망 와 판관으로 일하는 인물이다. 

 이밖에도 정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며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누군가의 사소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의 희비를 가르고, 인생을 뒤바꾼다. 아무리 광개토왕 같은 자연재해급 인물이 역사의 큰 방향을 결정한들, 그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역적전』의 등장인물들은 정말이지 5세기 사람들 같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곽재식이 21세기에 소설을 쓰며 5세기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해보일 수 있지만, 어쨌건 그는 최대한 ‘5세기스럽게’ 인물들을 그려냈다. 사실 『역적전』의 세 주인공은 굉장히 평면적인데, 이마저도 ‘근대적 자아’란 게 생겨나기 훨씬 전이 배경이라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처럼 『역적전』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재미있고 모범적인 소설이지만, 이 책의 진가는 역사서와 함께 엮어 읽을 때 빛을 발한다. 작가가 탄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곳곳에 ‘통념’과는 전혀 다른 고대를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크게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역적전』을 조금 더 깊게 읽어보자.

 첫 번째 키워드는 ‘물’이다. 작중에서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마치 고속도로처럼 자유롭게 이용한다. 백제의 도성에 살던 사가노는 주인인 협지와 함께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가려다 신라 군함을 만나 가락국에 정착한다. 출랑랑 역시 집안이 몰락한 후 해적질을 하며 살아간다. 작중 흑막(?) 비스무레한 위치에 있는 용녀는 바다를 오가는 대규모 상단을 이끄는 선주로, 본래 가야 출신이나 육상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한다.

 사람이 오가는 네트워크로서의 강과 바다, 그리고 이를 무대삼아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해상세력의 역동성에 관심이 생긴다면 『바다에서 본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를 보시라. 전자는 13세기 이후를 주로 다루고, 후자는 배경이 일본인지라 『역적전』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역사의 중심은 육상의 정치권력이고, 해상세력은 어디까지나 이들에게 복속된 존재였다는 우리의 상식을 뒤흔든다.

 예컨대 이런 상상을 해보자. 전근대 한반도에선 ‘중국인/일본인’, 중국에선 ‘한반도인/일본인’, 일본에선 ‘한반도인/중국인’이라 불린 해상은 사실 동일집단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바다에 적을 두고 세 ‘육지’와 모두 교류하며 그때그때 출신을 둘러댄 건 아니었을까? 해상세력을 ‘독립변수’ 삼아 새롭게 본 역사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이동’이다. 『역적전』의 사람들은 혼자 다니든 무리를 짓든, 원해서 간 것이든 떠밀린 것이든 여기저기 엄청나게 쏘다닌다. 사가노가 가락국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자신처럼 왜국으로 가려다 실패한 백제인들이 일종의 ‘난민캠프’를 이루고 있었다. 가야 출신인 출랑랑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사람도 남쪽으로 내려와 있던 고구려 칼잡이였다. 

 고대인의 활발한 이동이 소설 속 허구에 불과하지 않다는 건 『동아시아 세계론의 실천과 이론』과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벌어지고 국경이 바뀌던 고대 동아시아에선 고향을 잃어서, 혹은 전쟁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트고 사신을 오가게 할 필요성도 컸다. 요컨대, 당시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사이에는 오히려 그 이후 시대보다도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했던 것이다. 국가 간의 경계가 선명해지고 육상 정치권력의 통제력이 강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여성’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순히 적극적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납고 강인하다는 표현이 보다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칼잡이이자 무자비한 성격파탄자인 출랑랑, 그의 라이벌인 여당아, 가야를 좌지우지하는 거물인 용녀까지, 힘 좀 쓰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오히려 사가노나 하한기처럼 남성 쪽이 훨씬 조신하다. 곽재식이 친절하게 주석을 달았듯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고대 한반도의 여성에 대한 좋은 책을 찾지는 못했다. 여러분께서 무지하고 게으른 글쓴이를 깨우쳐주시길 바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사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과거에 대한 상상력을 말살하지 말라는 글을 종종 접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풍요로운 오류’를 ‘척박한 진실’보다 훨씬 좋아하는지라 이런 얘기에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상상력 운운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결과는 대부분 뒤틀린 욕망을 과거에 투사하는, ‘척박하고 위험한 오류’이기 일쑤다. 곽재식의 『역적전』이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발랄한 상상력은 사료에 탄탄히 뿌리를 내려야만 비로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혹시 앞으로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거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한다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조용히 『역적전』을 손에 쥐어주도록 하자.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주자. 


“고대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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