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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un 16. 2019

사민평등의 혁명, 혹은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미중 무역 분쟁, 북핵문제, 지구온난화 등으로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는 지구에 느닷없이 한 무리의 불청객이 찾아온다. 거대한 은빛 우주선을 탄 이들의 정체는 바로 은하계 저편 시리우스별의 외계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한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과학기술과 지구의 천연자원을 교환하자는 등, 일견 온화하고 합리적인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흉측한 파충류로, 지구의 모든 물을 뺏고 지구인들을 하림 냉동 치킨너겟으로 만들어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너무나 빤해서 외려 놀라울 정도의 시나리오인 만큼, 앞으로의 전개 역시 쉬이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짠하고 나타나줘야 한다. 하지만 감독이 헤까닥한건지 아님 제작사의 외압이 있었던건지는 몰라도, 갑자기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고 치자. 주인공은 지구가 진정으로 독립적이려면 외계인의 과학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 외계인과 손잡고 지구의 권력을 장악하기로 맘먹는다. 지구인의 독립을 위해 외계인과 손잡는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발상인가!

만일 미드 《V》의 줄거리가 외계인의 힘을 빌려 지구의 독립을 이루려는 식으로 바뀐다면?

 《리얼》 급의 망작이 아닌 이상, 이렇게 막나가는 시나리오를 가져다쓰는 영화는 단언컨대 없다. ‘외세를 이용한 독립’이라는 이 아이러니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쪽은, 놀랍게도 영화계가 아니라 학계다. 그 누구보다 엄밀하고 논리적이어야 마땅할 학자들이 그랬다고?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외교사 연구자인 김종학은 적어도 19세기 말 조선에서 벌어진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저런 형용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져 왔다고 지적한다. 그 사건, 다들 눈치 챘겠지만 바로 갑신정변이다. 그의 책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는 갑신정변을 둘러싼 아이러니를 철저히 파헤친다.    

김종학의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김종학은 갑신정변의 주역이 박지원과 그의 손자 박규수로 이어지는 북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교과서적 설명’부터 와장창 깨트린다. 1881년을 전후해 일본 언론과 외무당국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개화당’이라 불린 이 불온한 무리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의역중인(醫譯中人)과 비주류 양반이었다. 철저한 아웃사이더에 머물러있었던 이들 개화당이 원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이나 ‘근대화(서구화)’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외세의 힘을 빌려 조선의 썩어빠진 신분제를 완전히 갈아엎는 것이었다. 

 갑신정변이 불온한 아웃사이더들의 은밀한 혁명모의로 재구성됨에 따라,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역시 마치 잘 쓰인 추리소설과도 같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제43회 월봉저작상을 받은 전문연구서란 사실조차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책이 갖는 흡인력은 굉장하다. 특히 1장과 2장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짜릿함과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두 장의 주인공인 역관 오경석과 승려 이동인이 꾸미는 음모의 스케일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역관 오경석과 승려 이동인. 이들이 꿈꾸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이 아니었다.

 1장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관 서기관 윌리엄 F. 메이어스의 회고는 그 자체로 독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긴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어스의 회고에 등장하는 조선인 역관은 무려 영국이 군함을 동원해 조선을 침략해주기를 여러 번 간청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문제의 역관이 바로 오경석이라는 사실이다. 오경석이 누구인가, 박규수, 유대치와 더불어 개화파를 길러낸 인큐베이터라고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달달 외웠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오경석이 왜 메이어스에게 조선을 침략해달라는 ‘매국적인’ 부탁을 했을까? 

 오경석에게 조선이란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에 갇혀 산 채로 익어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알지 못하는 가련한 개구리였다. 지배계급인 양반은 밖으로는 나라의 빗장을 닫아걸고, 안으로는 공고한 카스트를 구축함으로써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여기에 신분의 한계로 자신 같은 인재가 평생토록 통역에나 종사해야 한다는 개인적 울분까지 겹쳐, 오경석은 조선을 뒤엎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치 않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설령 그 일이 영국이란 외세의 침략이라 할지라도. 

 2장의 주인공인 승려 이동인 역시 조선에 대한 불만이라면 오경석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일본 밀파라는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건 순전히 비천한 승려인 자신을 허물없이 대해준 김옥균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동인이 양반 이너서클로부터 받아온 멸시와 차별이 컸다는 방증이리라. 

 요컨대, 개화당의 초창기 멤버들은 빼어난 능력과 탁 트인 국제적 감각을 갖추었음에도 양반네가 구축한 공고한 카르텔에 가로막혀 산 채로 썩어가던 비운의 아웃사이더였다. 따라서 이들 개화당은 박규수와 같은 온건개화파와 결코 함께 묶일 수 없다. 똑같이 조선의 문호개방을 외쳤다한들 전자의 목표가 혁명에 준하는 철저한 개혁이었던 반면, 후자의 그것은 보수적인 개량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최근 저스툰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 박규수와 오경석은 꽤 죽이 잘 맞는 콤비로 등장하는데, 사실 오경석은 마음속으로 박규수를 그 누구보다 미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 84화 <열하문안사>에 등장하는 박규수와 오경석(출처:https://www.justoon.co.kr/content/home/09qh02k1cc6e)

 이처럼 1장과 2장에서 저자가 제시한 개화당의 재해석은 굉장히 파격적일뿐 아니라, 상당한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화당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 가면 갈수록, 현실정치에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저자의 파격은 힘을 잃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경석과 이동인이 ‘리타이어’하고 결국 김옥균과 박영효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경석은 1877년에 사망하고, 이동인은 1881년 일본에서 실종된다. 그리고 이들 중인 아웃사이더 1세대를 이어갈 2세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말마따나 중인계급은 “자기들끼리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형성하고 또 요샛말로 하면 서로 자제들의 과외교습을 해주면서 기술직을 독점적으로 세습”했다. 따라서 이들은 양반을 능가하는 강력한 동류의식이 있었을 터이지만, 이 책 어디에도 중인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였다는 언급은 없다. 중인계급이 정말 개화당의 중심이었다면, 프랑스의 제3신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황국협회를 결성해 만민공동회를 때려 부순 보부상만큼의 집단적 활약상은 보여줬어야 했다.

 열심히 불씨를 피워놓고 정작 중요한 때 사라져버린 중인의 빈자리를 메우는 건 비주류 양반들이다. 그나마도 이들은 아웃사이더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김옥균이나 박영효 같은 몇몇 인물, 아니 사실상 김옥균 한 명의 얼굴을 빌려 등장할 뿐이다. 그래, 김옥균은 확실히 평등사상의 소유자였다고 치자. 하지만 당장 갑신정변의 또 다른 주역인 박영효조차 끝내 철종의 부마라는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했다고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갑신정변이 몇몇 양반네들의 쿠데타였고 그나마도 서로 간에 일치된 의견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를 정말 사민평등을 향한 혁명모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자는 갑신정변으로부터 ‘자주독립’과 ‘근대화’란 선입견을 벗겨내는데 성공했지만, ‘사민평등’이란 새로운 정의를 덧씌우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갑신정변은 그저 양반 엘리트 사이의 권력쟁탈전, 노골적으로 말하면 밥그릇 싸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갑신정변의 주역은 결국 양반 도련님 김옥균과 박영효인 것일까?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가 갖는 한계는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파충류 외계인의 비유를 들어 갑신정변에 대한 기존 이해를 비판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이 비유는 저자 본인이 쓴 서문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인데, 여기서 저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첫째, 지구는 하나가 아니다. 지구는 200개가 넘는 나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연히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존재한다. 둘째, 독립은 언제나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즉 independence 뒤에는 꼭 from이 붙는다. 

 자, 이제 두 사실을 합쳐보자. 지구 어딘가에 있는 작은 나라는 강대한 이웃나라의 간섭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 고도의 과학기술을 가진 외계인들이 지구에 들이닥친다면, 작은 나라가 이들의 힘을 빌려 이웃나라의 입김에서 벗어나려 하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요컨대, 정말 독야청청 개썅마이웨이가 아닌 이상 ‘외세를 이용한 독립’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화당이 추구한 ‘독립’ 역시 ‘청으로부터의 독립’이었기에,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리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아가, 과연 저자의 말마따나 독립이라는 ‘대외적 목표’와 신분제 타파라는 ‘국내적 목표’가 철저히 구분되는지도 의문스럽다. 이 점에서 2018년 5월에 열린 제20회 아산서평모임에서 경제사학자 이영훈이 이 책에 덧붙인 코멘트는 굉장히 시사적이다.      


정치외교사나 국사학계의 통념에서 나오는 언술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 체계가 외세 체계를 내면화해 구조화한 체계이다. 즉 외세와 내세를 구분해 말하기 힘들다.      


 중화질서는 세계를 천자와 제후, 오랑캐로 나누었고, 가장 모범적인 제후국인 조선은 이를 군주와 신하, 상민, 그리고 노비라는 신분질서로 일국 단위에서 똑같이 재현했다. 조선의 신분제와 중화질서 사이의 연속성은 조선이 대중국외교와 자국의 제도, 과거, 학교업무를 예조(禮曹)라는 하나의 부서에서 관장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조선의 신분제 철폐는 곧 중국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인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신하되기를 거부한다면 자국의 군신관계 역시 새롭게 재편해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듯이 외교와 내치는 떨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2018년 5월 제20회 아산서평모임(출처: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1)


학계의 ‘김옥균’이 되려고 하느냐!     


 이 책의 모태가 된 박사논문을 준비할 당시 저자가 주변 연구자들로부터 숱하게 들었다던 이야기다. 확실히 갑신정변에 대한 그간의 통념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저자의 모습은 ‘그’ 김옥균에 비견될 정도로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고작 왕을 사로잡음으로써 조선을 뒤엎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김옥균만큼이나 저자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의 가치는 주제의 파격성이나 설득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의 진가 역시 ‘줄기’가 아닌 ‘곁가지’에서 드러난다.

 다소 나이브하고 덤벙대는 김옥균과 달리, 김종학은 치밀한 사료분석을 바탕으로 책 곳곳에 생각해봄직한 질문들을 숨겨놓았다. 고작 임오군란 한 번으로 소진될 만큼 빈약한 조선의 재정, 무려 고종에게 ‘반성문’을 강요할 정도로 막강했던 양반계급의 위세, 일체의 중간단체가 부재한 가운데 정치적 권위를 담보해줄 유일한 ‘상징’으로서의 국왕, 도덕률마저 초월한 ‘리바이어던’의 화신 흥선대원군 등, 각각의 질문들이 논문 한 편 급의 깊이와 밀도를 자랑한다. 

 나는 종종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가 세대별로 극명히 갈린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젊은 세대에게 김옥균은 빼도 박도 못할 ‘친일파’요, 갑신정변 역시 경솔하게 외세를 끌어들인 치기어린 쿠데타에 불과했다. 반면 나이든 세대는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 뿐 김옥균에겐 연민을, 갑신정변엔 아쉬움을 느끼는 듯했다. 이러한 ‘세대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족주의 교육의 ‘세례’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선진국 국민’이라는 지위가 젊은 세대에게서 어떠한 ‘감각’을 앗아간 건 아닐까?

 젊은 세대는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곳곳에 저자가 배치한 질문들을 따라가며 이 ‘감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허구한 날 서양열강에 쥐어터지며 밥 먹듯이 배상금을 뱉어내고도 끝내 망하지 않았던 청과 달리, 왜 조선은 구식 군대의 반란 하나 진압하고는 폭삭 주저앉아 버렸을까? 김옥균이 조선을 뒤엎기 위해 채택한 방법이 겨우 왕을 사로잡는 것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김옥균을 대하는 나이든 세대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한 뒤에야, 우리는 갑신정변이 과연 사민평등의 혁명인지 아니면 양반네의 밥그릇 싸움인지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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