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페미니즘』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2016년 7월 30일,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을 반대하며 들고 일어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총장의 요청으로 투입된 1600명의 경찰과 팽팽히 대치중이었다. 머지않아 진압될 게 불 보듯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 학생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다름 아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이날의 시위를 계기로 <다시 만난 세계>는 여성들의 연대와 우애를 상징하는 노래로 거듭났다. 뿐만 아니라 2016년 촛불항쟁과 2017년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도 울려 퍼지는 등, ‘21세기 민중가요’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노래는 힘이 세다. 시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는 사람들을 울고, 웃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특히 약자와 소수자의 감수성이 노래에 실렸을 때, 그 파괴력은 종종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기도 한다. <다시 만난 세계> 역시 진취적이고 동지의식 충만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기에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청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물론 한국에서 이는 매우 특수하고 예외적인 사례다. 소수자, 그 중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하지만 팝음악도, 페미니즘도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긴 역사를 갖는 미국에서라면 어떨까? 오랜 세월만큼이나 지난하고 힘겨웠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감동적인 팝음악과 페미니즘의 연대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박준우의 『노래하는 페미니즘』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저자는 조곤조곤 담담하게, 하지만 필요할 때는 확실히 감정을 실어가며 페미니즘이 팝음악을 통해 미국에서 목소리를 키워간 역사를 이야기한다.
명실상부 자유와 민권운동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재즈는 1920년대를 풍미했지만, 이 시기 여성 연주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여성 음악인은 꾸준히 등장했는데, ‘페미니스트 임프로바이징 그룹(Feminist Improvising Group, FIG)’이 대표적이다.
‘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1950년대를 지나 비틀즈가 전 세계를 뒤흔든 1960년대에 이르면 레슬리 고어와 퀸시 존스, 나나 시몬 등이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그럼에도 여전히 빛나는 자신의 주체성을 노래하며 작품성과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그리고 1980년대,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등장으로 마침내 팝 페미니즘은 미국사회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로 떠오른다.
두 영웅 이후의 역사는 인물도, 사건도, 지향점도 너무나 각양각색이지만, 『노래하는 페미니즘』은 이 다양한 목소리를 가감 없이 최대한 오롯하게 담아낸다. 물론 누군가는 책이 ‘페미니즘’의 정의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잡는 건 아닌지 의문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저자는 비단 ‘여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프랭크 오션처럼 흑인/남성/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음악인도 팝 페미니즘의 계보에 포함시킨다. 뿐만 아니라 비욘세처럼 기껏해야 ‘남성과의 관계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여성’을 노래한 음악인 역시 한 꼭지로 중요하게 다룬다.
자칫 ‘나이브함’으로 비칠 우려가 있는 이러한 서술은, 그러나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시사점을 갖는다. 첫째, 페미니즘이야말로 휴머니즘이다. 이는 ‘페미니즘 말고 휴머니즘’을 외치는 멍청이들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휴머니즘 없는 페미니즘’에 열광하는 일부 레디컬 페미니스트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최근 게이를 ‘똥꼬충’으로, 난민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매도하며 적과 동지를 선명히 나누려는 움직임이 인터넷 공간에서 적잖은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없을지언정, 페미니즘은 성소수자나 유색인종과 같은 소수자와 연대해야만 한다. 다양한 차별과 억압의 경험을 나눔으로써 페미니즘은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지고, 가부장제에 대항할 힘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프랭크 오션과 같은 음악인은 팝 페미니즘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둘째,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몇몇 불철저함과 실수, 경솔한 행동을 근거로 페미니즘의 ‘모순’과 ‘자기기만’을 보란 듯이 떠들어대는 작자들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도 사람인데 누군들 실수가 없고, 숨겨둔 욕망이 없겠는가? 유독 페미니즘에 대해서만 강박적으로 ‘무오류성’을 요구하는 건 너무나도 치사하고 쫀쫀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 페미니즘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를 깐깐하게 따지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수많은 주의주장을 끌어안되, 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일이다. 실제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던 비욘세는 이후 성녀/창녀/팝스타/아내/어머니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고 가면서도 ‘흑인 페미니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 모든 정체성은 모순 없이 자연스럽게 비욘세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팝 페미니즘의 풍요로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과 달리, 케이팝은 이제 막 페미니즘을 만난 상태다. 아니, 오히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봤을 때 케이팝은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스에이 출신의 수지는 피팅모델 양예원이 당한 불법 누드촬영을 고발하는 국민청원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레드벨벳의 아이린 역시 페미니즘 소설인 『82년생 김지영』을 지나가듯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성들의 강렬한 분노를 샀다. 가장 최근의 버닝썬 게이트는 남성 아이돌의 저열하고 징그러운 성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지만, 수사는 답보 상태에 머물러있다.
이처럼 ‘케이팝 페미니즘’이 처한 상황은 결코 밝지 않지만, 긍정적인 변화 역시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걸그룹 레드벨벳과 블랙핑크는 청순하고 가련한 ‘여동생’이 아니라 쿨하고 멋진 ‘언니’ 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여덕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게이와 이민자 자녀, 유색인종을 비롯한 소수자의 감성을 자극했기에 세계적인 팝스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말이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울 때라는 말이 있듯, ‘케이팝 페미니즘’ 역시 화려한 비상을 위한 마지막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저자가 ‘케이팝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이런 근사한 책을 써내는 그날까지, 한국어로 노래하는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음악인은 세상의 편견과 억압을 다음과 같이 되돌려주자!
이렇게 부르면 기분이 조크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