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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un 09. 2019

맹랑한 아류, 번역의 가능성

『번역과 번안의 시대』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줄 거야 
메마른 가슴 속을 적셔줄 멜로디
슬픔의 기억들에 기쁨을 채워줄 거야
넘치는 음악 속에 리듬을~

 

지난 5월 15일, 이화여대 캠퍼스에 울려 퍼진 노래는 다름 아닌 애니메이션 《달빛천사》의 오프닝 <나의 마음을 담아>였다. 이날 대동제 무대에 오른 주인공은 바로 수많은 애니메이션의 명 주제가를 부른 성우 이용신! 그가 세월의 흐름을 보란 듯이 비켜간 청아한 목소리로 <나의 마음을 담아>를 부르자, 어린 시절 《달빛천사》를 보고자란 수많은 90년대생들은 그야말로 광광 울고야 말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용신이 이화여대 대동제에서 부른 세 곡 중 무려 두 곡이 한국 자체 제작 주제가였다는 사실이다. 《달빛천사》의 한국판 오프닝인 <나의 마음을 담아>와 일본판 오프닝인 <I♥U>는 완전히 다른 노래고, 이러한 차이는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깐 똑같이 《달빛천사》를 보며 어릴 시절을 보냈다 해도,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추억하는 애니의 분위기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긴, 애초에 이 애니가 한국에서는 《달빛천사》로, 일본에서는 《満月をさがして(만월을 찾아서)》로 불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90년대생의 '인생애니' 《달빛천사》, 그리고 이화여대 대동제를 뒤집어놓은 성우 이용신(https://www.youtube.com/watch?v=s2uLHwZYHGM)

 설령 한국에서 주제가를 자체 제작하지 않고 일본 것을 번안했다고 한들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디지몬 어드벤처》의 주제곡 <Butter-Fly>를 살펴보자. 일본판 주제곡이 나는 연약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러 가리라는 희망찬 가사인 반면, 한국판은 결코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날아오르리라는 비장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한국의 <Butter-Fly>는 일본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다른 노래인 것이다. 

 혹자는 한국의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을 ‘열등’과 ‘아류’로 폄하하곤 한다. 일본판에 자막 달면 될 걸 괜히 어색한 한국어로 작품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이 그렇게 ‘열등’하다면, 이용신의 무대에 이대생들이 열광적인 ‘떼창’으로 응답했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어 더빙 《달빛천사》가 외려 일본어 자막을 달고 ‘역수출’된 현상은? 심지어 원래 애니메이션 《쾌걸 근육맨 2세》의 자체 제작 오프닝이었던 <질풍가도>는 이제 야구팀 응원곡으로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은 ‘원본’의 열등한 아류가 아니다. 오히려 90년대생들의 어린 시절을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줬을 뿐 아니라, 애니 오프닝이라는 ‘태생’을 극복하고 다방면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요컨대,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이라는 형식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번역’함으로써 한국문화는 더욱 풍요로워진 것이다. 

 어떤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소한(?) 장르도 이럴진대, 번역이 갖는 잠재력과 창조적인 힘을 좀 더 제대로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딱 알맞은 책이 있으니, 바로 박진영의 『번역과 번안의 시대』다. 제37회 월봉저작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번역’과 ‘번안’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해간다.


박진영의 『번역과 번안의 시대』

 『번역과 번안의 시대』의 ‘본적지’는 도서관 십진분류법 상으로 800번대, 그러니깐 문학 관련 서적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국문학 연구서와는 결을 달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무려 화학과(!)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과 베이스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잘 모르겠는 몇몇 국문학 연구자들과 달리 저자의 문장은 간결하고, 논리는 탄탄하다. 본디 300번대 서가에 꽂혔어야 했는데 잘못해서 800번대 라벨이 붙은 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견고한 책이다. 역시 가장 대단한 존재는 ‘글 잘 쓰는 이과(출신)’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럼 가장 하찮은 존재는... 굳이 밝히지 않도록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그간 한국 문학사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1910년대 번역과 번안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본래 한국 문학사에서 1910년대란 이인직과 이해조의 신소설로 대표되는 1900년대와 최초의 근대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이 등장한 1917년 사이에 놓인 일종의 ‘무풍지대’였다. 일제의 압도적 폭력에 신음하던 암울한 시기, 문학다운 문학이 등장하지 못했던 미숙한 시기라는 선입견이 1910년대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인직의 『혈의 누』와 이광수의 『무정』, 1910년대는 이 두 소설 사이에 놓인 ‘무풍지대’다

 하지만 저자는 1910년대야말로 한반도에서 ‘근대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방식이 모습을 드러낸 태동기라고 주장하며, 이를 가능케 했던 수단으로 번역과 번안을 지목한다. 사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곤 하지만, 서구 역사에서도 ‘근대소설’이 등장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하물며 한문/언문의 이중언어 체계에 놓여 있던 한반도에서는 ‘근대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세련된 자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것 자체가 난망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노베이스’인 상황에서 ‘근대소설’의 맛이나마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근대소설’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다른 언어권의 작품들을 자국어로 최대한 그럴싸하게 소화해내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역사가 곧 번역과 번안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저자는 크게 ‘번역/번안의 태도와 방법’, ‘출판/언론매체의 기능’, ‘소설 언어의 반응’을 좌표축 삼아 1910년대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정을 설명한다. 1910년대에 이르면 소설은 인민을 계몽하고 교훈을 제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순전히 ‘읽는 재미’를 위한 것이며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점차 퍼져나갔다. 1900년대를 풍미한 ‘기능주의’에 맞서 ‘문예주의’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번역할 때도 과감한 축약이나 생략보다는 원문을 오롯이 담아냄으로써 ‘읽는 재미’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안정적인 지면을 제공함으로써 ‘근대소설’이라는 긴 이야기를 안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제공했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비단 소설을 대하는 태도만 달라진 게 아니다. 근대소설의 감수성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게끔 언어 역시 새롭게 창조되었다. 주된 종결어미가 ‘~라’에서 ‘~다’로 옮겨갔고, 따옴표와 문단 구분 등을 통해 작가의 서술과 등장인물의 대사가 구분되었다. 다소 아이러니할 수 있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순 한글의 한국어 문장’은 결국 일본소설을 번역하고 번안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위와 같은 혁신에 힘입어, 1912년 조중환이 일본의 가정소설 『호토토기스』를 『불여귀』로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번역소설과 번안소설은 신소설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주류’로 등극했다. 한국 근대문학의 빛나는 성취로 평가받는 이광수의 『무정』 역시 번안소설이라는 풍요로운 토양이 없었다면 결코 꽃봉오리를 틔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번역과 번안을 통해 한국어는 ‘근대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방식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갔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가능성이 생겨나기도 했다. ‘식민지’라는 한반도의 현실이 ‘제국’ 일본의 소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1910년대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의 ‘가테이쇼세츠(家庭小說)’를 어떻게 번안했는지 살펴보자. ‘가테이쇼세츠’는 덴노(天皇)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적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조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국가’는 결코 전면에 등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인 작가들은 ‘가테이쇼세츠’를 ‘가정소설’로 번안하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국가는 물론이고 국가와 연결된 봉건적 가족제도마저 철저히 지워버렸다. 국가와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한 건, 오직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부부관계였다. 

 이상협의 번안소설 『해왕성』 역시 흥미로운 사례다. 『해왕성』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일본어 번안소설인 『암굴왕』을 다시 번안한, 말하자면 ‘재번안소설’이다. 하지만 『해왕성』은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을 전환함으로써 ‘원류’는 물론 ‘경유지’와도 전혀 다른 주제의식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이상협은 소설의 무대를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파리에서 중국의 상하이와 베이징으로, 역사적 배경을 나폴레옹이 재기를 노리다 100일 만에 몰락한 1815년에서 쑨원이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결성한 1894년으로 바꾸었다. 본래 제국의 낭만적 상상력에 뿌리를 둔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식민지 지식인 이상협의 손을 거쳐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에 통쾌한 일침을 날리는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났다. 

조중환의 『장한몽』과 이상협의 『해왕성』, 두 소설은 번역과 번안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일본어 중역’은 오랜 세월 한국 학술·문화계의 부끄러운 꼬리표였다. 많은 지식인들은 한국이 ‘주체적으로’ 서구의 학문과 문화를 소화해내지 못하고 일본어 번역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했다. 일본에 대한 이러한 ‘콤플렉스’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도 일본식 어투 혹은 일본식 한자어를 몰아내고 순우리말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곤 한다. 

 하지만 일본어로부터 벗어난 한국어에 과연 ‘돌아갈’ 곳이 있을까? ‘일본어 잔재’를 싹싹 긁어냈을 때, 우리에게 남은 ‘순우리말’은 얼마나 될까? 눈에 불을 켜고 ‘일본어 잔재’를 솎아내거나 ‘일본어 중역’이란 태생적 한계에 좌절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나름의 가능성을 찾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박진영에게 한국의 번역사가 곧 일본어 중역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분노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국어 텍스트는 번역이라는 ‘매개변수’를 통해서만 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일본도 각각 라틴어와 한문을 번역함으로써 자국어를 ‘창조’했으니, 한국어가 일본어를 번역함으로써 비로소 제 모습을 갖췄다는 건 그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박진영에게 보다 중요한 건 “한국의 근대문학사 연구에서 번역이 과연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가, 번역이 독자적인 상상력을 짜낼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 책에서 ‘매개변수’가 아닌 ‘독립변수’로서 번역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새롭게 조망하려는 담대한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의도치 않게 일본의 가테이쇼세츠보다 진보성을 띄게 된 조선의 가정소설, 그리고 아예 ‘반제국주의 유니버스’를 새로 창조해낸 이상협의 『해왕성』은 그가 발굴한 빛나는 결과물이다.

 <나의 마음을 담아>의 가치 역시 《달빛천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냈다는데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화여대 대동제에서의 열광적인 떼창은 이 노래가 이미 한국문화 속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왕성』, 그리고 <나의 마음을 담아>와 같이 ‘원판’에 휘둘리지 않고 보란 듯이 활개치는 맹랑한 ‘아류’야말로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가꾸어왔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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