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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ug 14. 2019

'이영훈론'이 필요하다

B급 좌파를 읽느니 A급 우파를 읽게

    

 대학 새내기시절 들었던 <서양사개론> 수업에서 교수님이 건네신 말씀이었다. ‘맑스주의와 민족문제’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포스트모던 역사가로 알려진 분이셨다. 교수님께선 비록 동의는 되지 않을지언정 A급 우파의 관점이나 논리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무려 이영훈의 책을 추천하셨다. 뉴라이트이자 식민지 근대화론자로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이영훈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된 순간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위안부를 부정하는 이영훈을 읽으라고? 처음에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당연히 그가 쓴 어떠한 글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피하려 해도, 이영훈은 결코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펼쳐드는 책마다 그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영훈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평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혹 오해할까봐 미리 덧붙이자면, 그때 내가 읽은 책 중 기파랑에서 나온 건 단 한 권도 없었다. 이영훈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확실히 세간의 그것과는 다른 듯 했다. 이러한 불일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진짜 그를 한 번 읽어봐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학년이 올라간 뒤에야 나는 이영훈의 책을 읽어보았다.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 역작인 『한국경제사』였는데, 정말이지 놀라웠다. 교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것도 같았다. 호(戶)와 토지제도를 씨줄과 날줄삼아 선사시대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한국의 경제적 변화를 근사하게 그려내는 그 솜씨에 고작해야 학부생인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가히 악마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필력에는 압도를 넘어 매료될 지경이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역사가 이영훈의 가장 큰 강점이자 약점은 단편적인 사료를 엮어 그럴싸한 거대서사를 만들어내는 그 스토리텔링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흔히 이영훈하면 떠올리는, ‘숫자에 집착하는 무미건조한 경제학자’란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동료인 김낙년 동국대 교수다.)     


 내가 『한국경제사』에서 느낀 놀라움이 그저 학부생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는지, 이영훈은 이 책으로 2017년 월봉저작상을 수상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경제사』는 분명 두 권짜리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상은 『한국경제사Ⅰ』에만 수여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경제사Ⅰ』은 선사시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를, 『한국경제사Ⅱ』는 식민지시기부터 외환위기까지를 다룬다. 그러니깐 이 상을 주관하는 <월봉 한기악선생 기념 사업회>는 이영훈의 연구는 19세기까지만 인정한다고 암묵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하지만 ‘조선후기 연구자’ 이영훈과 ‘식민지시기(와 그 이후) 연구자’ 이영훈을 나누어 전자만을 긍정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는 『한국경제사』를 ‘통사’로 썼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경제사Ⅰ』과 『한국경제사Ⅱ』가 출간된 날은 똑같이 2016년 12월 20일이다. 글을 읽어봐도 시기를 달리할 뿐 역사를 서술하는 그의 관점은 지극히 일관적이며, 나름의 문명론이랄 것을 갖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이영훈의 역사관, 혹은 문명론을 포착한 건 그를 인터뷰한 김항과 이혜령 정도인 듯하다.(이영훈의 문명론에 관심이 있다면 「이영훈: 탈이론, 탈신화의 경제사」, 김항·이혜령 편,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을 참고하라)     


 이영훈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는 한국 역사학계를 풍미한 저명한 학자들의 회고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 이영석의 『삶으로서의 역사』, 임지현의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서 이영훈은 성실하고 탁월했지만 끝내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만 안타까운 학자로 묘사된다. 한때의 동료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하는 마음이 느껴진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나를 가르쳐주신 교수님들 역시 “뉴라이트 중에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인데 하도 왕따를 당해 이상해져버렸다거나”거나 “그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역사학자가 아닌 경제학자다보니 한계가 있다”는 식으로 이영훈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셨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곳에서 비슷비슷한 얘기를 듣다보니 나중엔 학계에서 이영훈을 언급하지 않기로 ‘신사협정’이라도 맺었나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는 이영훈에 대한 학계의 이런 애매한 평가, 혹은 평가의 유보가 결국 그를 제대로 비판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영훈을 향한 비판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 정말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는 실정이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꼽아보겠다.

 첫째, 이영훈이 일본 극우로부터 돈을 받았다거나 정치에 뜻을 두고 있다는 인신공격성 비판이다. 이영훈이 일본의 도요타(豐田)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당시 한국에선 ‘전임’이 아닌 연구자들이 연구비를 받을 방법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도요타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해서 꼭 재단의 입맛에 맞는 결과만을 가져와야하는 것도 아니다. 이영훈 본인이 이야기하듯 『식민지의 일상』을 편집한 공제욱과 정근식을 비롯해 해마다 도요타재단의 연구비를 받는 한국인 학자가 적지 않다.

 이영훈이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비판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가 정치인이라면 바로 매장당할 ‘문제적 발언’들을 아주 오래 전부터 일삼아왔기 때문이다. 한일 무역 갈등 이후 문재인 정부와 자한당의 지지율 추이를 봐도 알 수 있듯, 한국은 아직까지 세대를 막론하고 반일감정이 뿌리 깊은 나라다. 그런 상황에서 이영훈처럼 과격한 헛소리를 계속하는 건 정치꿈나무로서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또 적어도 내가 알기로 그는 함께 뉴라이트 운동을 주도한 영국사 전공의 박 모 전 교수처럼 보수정당과 적극적으로 교류한 바가 없다.      


 둘째, 이영훈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한국사를 폄하한다는 비판이다. 이는 이영훈에 대한 가장 큰 오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는 ‘일빠’라기보다는 ‘조선왕조까’에 가깝다. (물론 한국에서 양자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영훈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가를 완전히 동화시켜 일개 지방으로 전락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애초에 실현될 수 없는 망상에 불과했다고 단언한다. ‘근대화’ 역시 일제가 영구적으로 조선을 수탈해먹기 위해 도입한 유무형의 제도로 인해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결코 일제의 선의가 아니었다는 걸 확실히 한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한다. 일제에 의해 근대가 별 탈 없이 ‘이식’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이를 받아들일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수탈론이야말로 조선을 무력하고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 정도로 여기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그의 글에서 “아니 그럼 조선이 아프리카냐?”는 식의 비유가 수없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

 실제로 이영훈은 조선후기부터 확립된 소농사회라는 필드 위에서 부부와 2~3인의 자녀로 이루어진 소농가정이 어떻게 진취적인 경제인으로서 삶을 영위해갔는가를 생생한 필치로 서술한다. 어떨 때는 그가 ‘우파 민중사학자’가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물론 이영훈은 ‘민중’보다는 이들을 이끄는 (자신을 포함한) ‘창조적 소수’를 훨씬 더 사랑한다.     


 셋째, 이영훈이 근대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생각한다는 비판이다. 주로 식민지 근대성론 쪽에서 제기되는 비판인데, 이영훈은 여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자신은 경제사학자로서 경제적인 의미의 근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 근대의 사회적·문화적 모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코끼리에게 “너는 왜 그 큰 로 저 비둘기처럼 날지 않니?”하고 물어보는 꼴이다.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 그룹은 외려 식민지 근대성론이 실은 근대화론과 배치되지 않는데도 트리키(tricky)하게 말을 달리하고 있다며 비판한다.    

 

 넷째, 똑같이 양적 방법론에 기초한 비판이다. 허수열 전 충남대 교수의 『개발 없는 개발』이 대표적으로, 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최근 많은 분들이 『개발 없는 개발』을 근거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완전히 논파된 양 여기시는 듯한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김낙년 교수를 중심으로 낙성대 그룹 역시 『개발 없는 개발』을 적극적으로 재반박했기 때문이다. 통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 왈가왈부하기 좀 그렇지만,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를 단정 짓기 어렵다. 아울러 허수열 역시 ‘민족’ 프레임에 빠져 공격의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영훈에 대한 비판이 이것만 있지는 않을 터이고, 의미 있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이영훈을 위시한 뉴라이트가 사회를 ‘자연화’함으로써 기성질서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고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가능성을 지워버린다는 후지이 다케시의 비판이 대표적이다.(후지이 다케시, 「시장에는 해방이 없다」, 《한겨레》, 2015. 01. 18.) 비판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의 무게가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었냐는 문명기의 지적 역시 좋은 참조점이 된다. (문명기, 「근대일본 식민지통치모델의 형성과 변용: ‘대만모델’의 관동주·조선으로 이식과 그 한계, 이타가키 류타 편, 『식민지라는 물음』)

 그럼에도 이런 비판들이 단편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영훈을 제대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비판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언제나 남는다. 따라서 나는 이영훈을 둘러싼 애매모호한 평가와 일방적인 매도를 모두 걷어내고 그를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특수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매우 ‘전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영미(英美) 근대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갈망하다가 끝내 맛탱이가 가는 후발국 지식인은 근대 이후 동아시아에 부지기수로 존재해왔다. 이영훈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윤치호의 후배이고, 복거일의 동기다. 이름을 밝히긴 그렇지만 오늘날 적지 않은 우파 지식인들의 선배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비판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영훈을 읽어야한다. 그의 거창한 문명론과 역사관, 그리고 이를 무리하게 역사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범하는 무리수와 파국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이영훈 평전』, 혹은 지식인론으로서의 『이영훈론』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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