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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ug 10. 2019

근대의 ‘바깥’

정일영, 『일제 식민지기 장묘제도의 변화와 ‘근대성’의 이면』

 한반도가 일본제국의 지배아래 놓인 1910년부터 1945년까지를 다루는 연구는 연구자가 누구고, 어떠한 시각을 가졌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당장 이 시기를 일컫는 호칭이 대일항쟁기에서 일정기(日政期)에 이르기까지, 정말이지 다양하다는 사실이 그 복잡다단함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식민지시기로 애매하게 퉁치고 가겠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기를 다루는 연구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총독부로 대표되는 식민권력의 ‘전능성’에 아무런 의문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대화론의 경우, 일제가 이식한 근대적인 제도 덕에 조선이 비로소 제 ‘포텐셜’을 터뜨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수탈론은 일제가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나) 나름의 개혁을 도모하던 대한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려 철저히 낙후시켰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양자는 식민권력이 (합병당시 1600만의 인구와 22만 제곱키로의 영토를 보유한) 조선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졌다고 여긴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다만 식민권력이 그 능력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했는가에 대해 근대화론은 어쨌거나 좋은 쪽이었다고 여기는 반면, 수탈론은 굉장히 나쁜 쪽이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대만사 연구자인 문명기는 근대화론과 수탈론 모두가 당연시하는 식민권력의 ‘전능성’에 의문을 던진다. 근거는 10년 앞서 식민지배를 받은 대만이다. 그는 대만에 비해 조선의 일인당 투자비용과 관료 수 등이 현저히 적었다고 지적한다. 고비용 고효율이라는 고토 신페이의 ‘대만모델’은, 대만보다 인구도 많고 면적도 넓은 조선에 결코 도입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고작 함경남도만한 대만에 파견된 관리의 수가 조선 전체의 그것과 맞먹는다는 당시 언론의 불만은, 과연 식민권력이 전능할래야 전능할 수 있었겠냐는 합리적 의심을 품게 만든다. 

 나아가 문명기는 식민권력이 전능하지 않다면, 그에 의해 추진된 ‘근대화’의 영향 역시 그렇게까지 심대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대담한 가설을 제시한다. 예컨대 식민지시기의 도시화율은 최고 20% 정도로,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20%라는 수치는, 여전히 80%의 조선인이 도시가 상징하는 ‘근대화’의 물결에서 한 발짝 비켜나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문명기, 「근대일본 식민지통치모델의 형성과 변용: ‘대만모델’의 관동주·조선으로 이식과 그 한계, 이타가키 류타 편, 『식민지라는 물음』 참고)

 문명기의 논문은 수탈론이든 근대화론이든, 심지어 양자 모두를 비판하는 근대성론이든 간에 식민지시기에 대한 연구가 하나같이 ‘근대’의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있었다는 성찰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과제는 그간 도외시되어왔던 근대의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일 터이다. 이는 식민지시기 장묘제도를 연구한 정일영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간 온돌이나 흰옷과 같은 조선의 ‘전통’이 어떻게 재인식되고, 어떠한 변화양상을 거치는가에 주목한 연구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대체로 식민권력이 조선인에게 안긴 상처와 트라우마만을 강조하거나(유선영, 『식민지 트라우마』) ‘전통’에 대한 복잡하고 애매한 심경만을 드러내는 데(권석영, 『온돌의 근대사』) 머무를 뿐이었다. 

 정일영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는 대담하다면 대담한 가설을 세워 식민권력과 조선의 지식인들이 내세운 문명화와 근대화의 ‘바깥’을 열어젖힌다. 뿐만 아니라 근대화의 논리가 어떻게 이 ‘바깥’을 제멋대로 왜곡하여 끝내는 ‘논리’가 아닌 ‘믿음’으로 전락해갔는가도 냉정하게 파헤친다.      


 1912년, 일제는 <묘지규칙>을 제정하여 모든 묘지의 신고를 의무화하고 사설묘지를 금지한다. 이는 식민지 대만은 물론 일본 내지에서도 이미 시행되고 있었으며, 그 내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히 조선인을 차별하고 억압한 정책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제가 <묘지규칙>을 통해 의도했던 바는 ‘민족차별’보다는 ‘위생’과 ‘경제’의 논리, 다시 말해 너무 많은 땅을 차지하는데다 불결하기까지 한 조선의 묘지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에게 묘지는 단순히 죽은 자를 묻은 장소 정도가 아니었다. 죽은 자를 어찌 모시느냐에 따라 산 자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는 믿음은 당시 조선에선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묘지관리에 온갖 정성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조선의 묘지를 비위생적이라며 폄하했지만, 조선인에겐 묘지야말로 ‘위생’이었던 것이다.

 장묘제도가 삶에 긴밀히 밀착된 문제였던 만큼, 조선인들은 거국적인 투쟁을 벌이기보다는 산발적·즉각적·개별적으로 <묘지규칙>에 저항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꿋꿋하게 조상을 모시는 조선인의 반발에 놀란 일제는, 1919년 사설묘지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고 1926년 공동묘지 내의 가족묘지 설정을 허가하는 등 <묘지규칙>을 개정한다. 

 <묘지규칙>의 개정은 얼핏 일제에 대한 조선인의 ‘민족적 투쟁’의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설묘지를 만들 여건이 되는 일부 조선인 재력가의 승리였다. ‘민족문제’란 이들 조선인 재력가의 지극히 사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프레임에 불과했다. 사설묘지는 그림의 떡이었던 돈 없는 대다수 민중들은 여전히 몰래 야산에 묘지를 만들었다. 조선인 지식인은 총독부가 “무단통치기에 유일하게 정상적이고도 계몽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공동묘지 정책을 깨부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하며 ‘동포’의 무지몽매함을 경멸했다. 요컨대, 실상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조선 대 일본이라는 단순한 틀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공동묘지와 더불어 일제가 조선의 장묘제도를 ‘문명화’하기 위해 권장한 또 하나의 수단은 화장(火葬)이었다. 정작 일본 본토에서 서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1873년 태정관 포고령을 통해 금지된 화장은, 조선에서는 ‘문명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총독부든 조선인 지식인이든 너나할 것 없이 화장을 예찬했고,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화장률의 증가를 “문화의 향상과 교육의 보급”의 결과인 양 추켜세웠다.

 하지만 화장률의 증가는 결코 근대화 혹은 문명화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저자 정일영은 다소 대담한 추측을 통해 도시부에서 화장률이 미미하게나마 증가한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 전염병 창궐이다. 조선의 전염병대책은 일본은 물론 대만과 비교해도 방역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그나마도 굉장히 강권적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전염병으로 도시에서 대량의 인구가 사망했을 때, 총독부는 이들을 빠르게 화장해버림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을 막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저자의 분석 결과, 1915년에서 32년까지 경성부의 조선인 화장률과 전염병 및 호흡기 질환 사망자 추이는 양의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다.

 둘째, 도시의 확장이다. 경성부의 경우 식민지시기 내내 꾸준히 면적이 늘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새롭게 도시부에 포함된 지역에 있는 대량의 무연고묘지가 문제가 됐다. 이에 대한 식민권력의 대응이란 상당수의 무연고묘지를 개장하여 그 시체 또는 유골을 화장하고, 이를 다른 곳에 이장하는 것이었다. 결국 수치상으로는 화장률이 증가했다 한들, 그 이면에는 근대화나 문명화와는 하등 상관없는 원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지식인들은 오로지 숫자만을 보고 조선이 점차 근대화, 문명화되어가고 있다고 단정했다. 근대는 논리를 넘어서 일종의 믿음으로 전락한 것이다.     


 위와 같은 정일영의 설명을 접했을 때, 솔직히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식민지시기에 일어난 근대적 변화를 인정하는 입장으로서, 또 (비록 능숙히 읽거나 다루지는 못할지언정) 수량적, 계량적 사고의 가치를 긍정하는 입장으로서 그간 숫자로 표현되는 것의 ‘이면’ 혹은 ‘바깥’을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사물들을 측정 가능한 숫자로 환원하여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건 서구문명의 위대한 성취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후쿠자와 유키치를 필두로 한 일본의 문명개화론자들이 가장 열광했던 게 당시 한창 뜨고 있던 통계학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화장률이라는 숫자에만 집착함으로써 결국, 가장 ‘객관적’이어야 마땅할 통계를 근대라는 ‘편협한’ 믿음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객관’을 통한 ‘주관’의 입증이라니,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이는 비단 식민지시대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세계와 그 바깥 사이의 긴장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해야 할까, 아니면 어느 한 쪽으로 팍 엎어져야 할까. 우유부단하고 나이브한 나로서는 이도저도 못하고 어정쩡히 서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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