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자, 지금부터 눈을 감고 한 전근대사회를 상상해보자. 유럽이든 동아시아든 상관은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나 유교 같은 보편종교에 포근하게 엮여있는 목가적인 공동체를 떠올릴 것이다. 근대 이전, 종교는 개개인의 삶에 안정감과 리듬을 부여하는 거대한 체계였다. 사람들은 출생과 결혼, 죽음에 이르는 삶의 전 과정을 종교에 의탁함으로써 비참하고 불안한 일상을 견딜 수 있었다. 종교에 의해 유지되던 공동체의 안녕과 통합은, 유럽에선 종교개혁과 시민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일련의 ‘근대화’를 거치며 비로소 깨지고 만다.
하지만 영국의 역사가 키스 토마스가 보기에 이러한 이해는 전근대에 대한 오해요, 폭력이다. 보편종교가 개인과 공동체를 빈틈없이 장악한 전근대사회의 이미지는, 뒤르켐을 비롯한 ‘비역사적’ 사회학자들이 퍼뜨린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책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는 종교와 마술이 뒤섞여있고, 경건한 퓨리턴과 심드렁한 무신론자가 함께 활동하던 근대전환기의 잉글랜드를 보여준다. 당대의 오만가지 기록을 긁어모은(역자의 노고에 경의를!) 이 세 권짜리 책을 읽고나면, 한 사회의 전체상을 묘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느낄 수밖에 없다.
책의 배경이 되는 16~18세기의 잉글랜드는, 우리들의 생각처럼 진보의 기운이 가득 찬 역동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인구는 웨일즈까지 합해도 1500년에는 250만에 불과했고, 2세기 뒤인 1700년에도 고작 550만에 머물렀다. 대부분의 전근대사회가 그러했듯 영아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혹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40세를 넘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페스트와 천연두는 주기적으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으며, 필요한 영양소를 제때 공급받지 못해 다들 구루병과 괴혈병을 달고 살았다.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도시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화재는 인간의 운명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생생히 각인시켰다.
요컨대, 근대전환기의 잉글랜드는 오늘날의 저개발국과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후자와 달리 전자에게는 생활수준이 현저히 높은 외국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당연히 그때는 전부 그렇게 살았으니까!) 16세기 잉글랜드인은 20세기 대한민국인처럼 외국에서 ‘근대화 모델’을 수입해와 사회를 통째로 뜯어고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고통과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거대하고 체계적인 계획을 마련하기보다는,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당대인들이 가장 신뢰했던 해결방안은 무엇이었을까? 일단 의학은 결코 아니었다. 대학 정규의학과정을 이수한 내과의는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갈레노스의 케케묵은 채액생리학 원리를 오직 이론적 수준에서 습득하는 게 고작이었다. 의사들은 작은 질병에도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맸고, 환자의 피를 뽑거나 강제로 토하게 만드는 것 말고는 마땅한 치료법을 강구하지 못했다. 1512년 잉글랜드 의회가 의사들을 “무식꾼의 거대한 무리”라고 싸잡아 비난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의사의 수도 너무 적었다. 1514년 개업의면허를 갖고 런던에서 활동한 외과의는 고작 72명에 불과했다. 당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의사란 신뢰하고 자시고를 떠나 평생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유니콘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의사보다 가깝고, 친절하고, 싸고, 무엇보다 훨씬 믿을만한 존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마술사가 바로 그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마술사의 마술과 주문이 대부분 기독교(가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수많은 이교 전통을 적극 흡수하며 세를 불려온 결과, 당시의 기독교는 마술사가 써먹기 딱 좋은 온갖 ‘미신’과 ‘주술’을 껴안고 있었다. 예컨대 성 요한과 성 발렌틴은 간질에 탁월하고, 성 로크는 페스트에 효험이 있었으며, 성 페트로닐은 학질에 좋다고 받아들여졌다. 비단 질병 치료를 넘어, 성인은 온갖 잡다한 일상사 처리에도 늘 호출 대기상태였다. 각종 이미지와 토템, 성유물과 성소는 사람들을 죽음과 질병으로부터 지켜주는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가톨릭 기도문을 거꾸로 외우거나, 고인(故人)용 미사로 산 사람을 축복해 죽음을 앞당기는 식의 저주도 횡행했다!
물론 교회 지도부는 공식적으로는 미신을 배격했고, 합리주의적 태도로 인간 자조(自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높으신 분들의 목소리는 기층민중은 물론이요 하급 성직자들에게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기도와 주술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구원을 전파하는 신부와 탁발수도사도 마찬가지였다. 까놓고 말해 의례와 미신을 가르는 기준은 교회의 승인여부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치인 레지날드 스콧이 조롱했듯, 교황은 부자만을 성인 반열에 올리고 빈민은 주술사로 파문했다. 적어도 민간 차원에서 마술과 종교의 경계는 애매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견딜 수 없었던 건 바로 이러한 애매함이었다. 이들은 애초에 가톨릭교회가 온갖 미신과 주술의 집합소이기에 그토록 마술사가 활개 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비난을 퍼부어댔다. 일체의 의례를 걷어내고 순수하게 신과 마주하려는 종교개혁의 열망이 점차 퍼져나감에 따라, 사회에 만연한 미신 역시 사그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미신은 사라졌을지언정,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은 여전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현실의 괴로움을 달래려는 수단으로 마술 대신 청교도의 ‘섭리’를 써먹었다. 섭리란 본래 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승에선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강조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일단 이승에서 일어난 일은 그게 무엇이든 신이 허락한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일단 받아들이기만 하면, 섭리는 실로 틀리는 법이 없는 무적의 방패였다.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섭리를 가져다 써먹었다. 이를테면 종교행사에서 한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고는, 주님께서 점지해주신 배필이 마침내 나타났다고 믿어버리는 식이었다.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예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퓨리턴은 자기 편견을 뒷받침해주는 심판과 섭리만을 인정했다.
이처럼 일상의 위험과 불확실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미신의 타파를 외치며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은 실상 가톨릭이나 마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할을 떠맡았다. 그렇다고 미신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가톨릭 역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이상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무신론 역시 성행했다. 그마저도 귀족 지성인의 무신론과 기층민중의 무신론이 달랐다. 한편에는 크리스토퍼 말로처럼 종교란 평민을 선행으로 이끄는 도구에 불과하다 여기는 마키아벨리스트가, 다른 한편에는 아주 원초적이고 직관적인 수준에서 영혼불멸성과 사후 부활가능성을 부인한 일부 롤라디가 있었다.
저자 키스 토마스가 묘사하는 근대전환기 잉글랜드의 풍경은 정말이지 어지럽고 복잡하다. 주기도문을 외는 마술사와 주문을 웅얼대는 가톨릭 사제, 마음에 드는 섭리만을 인정하는 청교도와 삐딱한 무신론자가 한 자리에 있었다. 이들을 보노라면 저자가 뒤르켐을 비롯한 ‘비역사적’ 사회학자들을 왜 그리도 비판했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뒤르켐이 상상한 모습이 아니었다고 해서 근대전환기의 잉글랜드가 기독교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시기 잉글랜드는 지극히 기독교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단, 이는 만인이 제 입맛에 맞게 기독교를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점에서만 그러하다.
‘근대’란 곧 보편종교로부터 해방되어 사회가 세속화되고 분화되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고전적인 이해는, 오늘날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듯하다. 그보다는 외적인 규율에 머물렀던 기독교나 유교가 점차 개인의 내면으로 침투해, 마침내 만인이 (서구는) ‘기독교화’되고 (동아시아는) ‘유교화’되는 과정이 ‘근대’이지 않았겠느냐는 관점이 조금씩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화’와 ‘유교화’의 결과가 과연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예컨대 18~19세기 조선에서 ‘인민의 유교화’가 이루어졌다는 인식은 이제 연구자들 사이에선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듯하다. 하지만 그 ‘유교화’의 내용은 관점에 따라 그야말로 널을 뛴다. 누군가는 ‘유교화’란 온 나라 양반되기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를 만인의 군자(君子)화로 추켜세운다.
나 역시 조선의 유교화가 온 나라 양반되기인지, 아니면 만인의 군자화인지 오랜 시간 고민했다.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를 읽고 난 뒤에야, 나는 이 (여러 의미로) 답 없는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세기 잉글랜드의 기독교는 미신인 동시에 진지한 믿음이었고, 엄격한 구속인 동시에 조롱의 대상이었다. 요컨대, 잉글랜드에서 기독교는 곧 모든 것이었다.
조선의 유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것은 신분 상승의 도구이기도 했을 것이고, 열정적인 배움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 허태용의 논문 「성리학으로 조선시대를 설명하는 연구경향의 비판적 고찰」(『역사비평』 2019년 여름호) 역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잘 생각해보면, ‘민주화된’ 2019년의 대한민국 역시 16세기의 잉글랜드나 19세기의 조선과 다르지 않다. 서로 정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똑같이 ‘민주주의’를 근거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주의’란 사실상 국민의 수만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말선초 사상사 연구자인 이상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국 한 사회가 ‘○○화’ 된다는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이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