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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ug 26. 2019

근대라는 아프리오리(a priori)(上)

김인수, 『일제하 조선의 농정 입법과 통계에 대한 지식국가론적 해석』

 예나 지금이나 ‘근대’는 내게 굉장히 중요한 고민거리다. ‘탈근대’인지 ‘성찰적 근대’인지, 한국에 ‘근대’가 과연 도래했는지, 일각에서 주장하는 ‘유교적 근대’란 무엇인지,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근대전환기를 그럴싸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지 등등, 내 대학시절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영양가도 없는 질문들을 꽤나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진 시간이었다. 지금와선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저 질문들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걸 보면 앞으로도 ‘근대’ 문제로 꽤나 골을 썩이며 살아갈 듯싶다.

 요즘 ‘근대’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이른바 ‘근대적 앎’의 문제다. 이질적인 대상들을 체계적으로 분석, 분류하여 양적인 지표로 환원해내는 능력은 엄청난 가능성과 그만큼의 한계를 동시에 갖는다. 그 가능성과 한계 중 어느 쪽에 집중할지야말로 근대 이후 지식인들을 괴롭혀온 문제일 것이다. 김인수의 박사학위논문 『일제하 조선의 농정 입법과 통계에 대한 지식국가론적 해석』(이하 『해석』) 역시 통계로 상징되는 ‘근대적 앎’의 문제로 고민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을 보여준다. 

 『해석』은 ‘근대적 앎’을 통해 지식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할 수 없게 되었는가를 차분하고 꼼꼼하게 추적해간다. 지난 4월 국문초록을 읽고 식민지시기를 배경으로 이만큼이나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논문을 다 읽고 나서는 (모든 글이 으레 그러하듯) 놀라움만큼 아쉬움 역시 또렷해졌지만.     

 저자 김인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한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든 혁명적 농민운동의 불길은 왜 1930년대에 이르러 사그라지고 말았는가? 기존 연구는 그 원인을 식민국가의 압도적 폭력성, 근대적 경제성장, 조선인 엘리트의 공모, 조합국가의 등장 등에서 찾고자 했다. 하지만 저자는 식민권력이 강제한 ‘인식체계’야말로 1930년대 농촌문제를 안정화시킨 요인이 아닐까하는, 굉장히 신박한 가설을 제시한다. 요컨대, 조선의 농촌문제를 고민할 때 항상 전제로 깔고 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그 너머를 상상할 수도 없는 일종의 ‘아프리오리(a priori)’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프리오리란 과연 무엇인가? 바로 ‘소작(小作)’이다. 

 오늘날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놀라울 수 있지만, 저자에 따르면 전근대 조선과 일본에서 ‘소작’이란 개념은 결코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열도 각지의 토지소유방식은 결코 하나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허나 1890년 『구민법(舊民法)』을, 1898년 『메이지민법』을 제정함으로써 이 다종다양한 토지소유방식은 점차 자작과 소작이라는 이항대립으로 정리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농민의 영소작권(永小作權)은 프랑스민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구민법』에선 물권(物權)으로 규정됨으로써 어느 정도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후의 『메이지민법』에서 영소작권은 사실상 채권(債權)으로 규정되었다. 전근대 농민의 관습적 토지소유권이 단순히 남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권리 정도로 떨어진 것이다. 채권으로 전락한 영소작권이 이후 일본의 지주제 발전에 이바지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국가에 의해 창출된 일본의 자작/소작 이분법 체계는 『메이지민법』을 기초한 우메 겐지로를 통해 조선에 이식된다. 비록 우메 본인이 1910년 급사하면서 그 자신의 손에 마무리 지어지진 못하지만, 1912년 제정된 (이영훈이 그렇게 좋아하는) 『조선민사령』은 우메의 스케치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다만 『메이지민법』과 달리 『조선민사령』은 법률을 뒷받침할 관습의 샘플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이후 식민권력은 재판 등을 통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관습을 취사선택해간다. 

 관습의 창출과 확정을 거치며 조선의 다종다양한 토지관행은 자작/소작으로 번역되고 균질화되었으며, 마치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양 당연시되었다. 현재의 ‘자연화’가 이뤄진 것이다. 소작개념의 강제는 농민들이 오랜 세월 보유해온 전통적 권리를 박탈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폭력이었다. 하지만 이전까지 파편화된 채 존재해온 농민들이 소작계급이라는 단일한 집단으로 목소리를 낼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동시에 가능성이기도 했다.     


 소작이라는 개념을 통해 조선의 농촌을 재편하려는 총독부의 기획은, 1920년을 거치며 보다 정교하고 치밀해진다. 1920년대 조선경제의 파탄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타오른 반제민족해방운동을 어떻게든 잠재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중반까지 내무국 사회과에서 관할하던 소작관련 업무가 1920년대 후반 식산국 농무과로, 1932년 이후 농림국 농촌진흥과로 이관된 것은 총독부가 소작문제를 ‘치안’이 아닌 ‘생산’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927년부터 1932년까지의 대규모 조사를 거친 끝에 등장한 『조선의 소작관행』(이하 『관행』)은 이러한 노력의 결정판이었다. 전 조선을 군(郡) 단위까지 세밀하게 조사한 『관행』은 사회에 대한 식민국가의 장악력이 절정에 올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관행』의 등장과 함께 농촌문제를 둘러싼 갈등양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이다.

 『관행』은 군(郡)과 토지의 성격, 납부형태 등에 따른 소작계약 기간과 소작료의 평균치를 계수화된 수치로 제시했다. 평균치라는 ‘사회적 균형점’의 발견은, 소작문제를 계급이나 민족문제에서 수치를 둘러싼 해석과 조정의 문제로 변모시켰다. 실제로 『관행』의 등장 이후 소작쟁의의 발발횟수 자체는 크게 늘어나지만, 이는 소작농의 ‘계급투쟁’이 아닌 개별 농가의 산발적인 불만제기에 가까웠다. 갈등의 양상 역시 『관행』에 근거해 자신의 소작료나 소작계약 기간이 평균보다 지나치게 많거나 적다는 사실에 항의하는 식으로 흘러갔다.

 이 과정에서 식민권력은 조선의 농촌경제를 파탄 낸 ‘원흉’에서 소작쟁의를 중재하는 ‘조정자’로 탈바꿈했다. 식민권력을 대신해 악당 역을 떠맡은 건 『관행』에서 문제적 범주로 초점화된 부재지주와 소작지관리인이었다. 결국 식민권력은 『관행』을 통해 혁명적 농민운동을 지리한 숫자싸움에 불과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농정파탄의 책임을 제3자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초월적인 위치에서 갈등을 조정함으로써 식민지 민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1920년대를 뒤흔든 조선의 농촌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관행』은 (그 주체가 식민권력만 아니었다면) 얼핏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치밀함과 광범함에도 불구하고 『관행』에는 뚜렷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농촌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소작’으로 환원해버렸기 때문이다. 

 『관행』이 등장함에 따라, 농민과 지식인 모두 소작문제만 해결되면 농촌이 안정을 되찾으리라는 환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따라서 1925년 《동아일보》에 실린 「경제파멸의 원인, 현상 및 대책」에서처럼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해체라는 급진적 대안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전에 비해 훨씬 좁아졌다.

 비단 ‘혁명’이 아닌 ‘개량’의 관점에서 보아도, 모든 문제를 소작에 돌린 『관행』은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 문제가 되었던 건 자작/소작의 여부라기보다는 농가의 규모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농민이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것보다는 자립이 가능한 규모의 땅을 경작하는 게 훨씬 중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총독부가 자영농을 육성하고자 요란하게 벌려놓은 자작농창정사업은, 세금과 금융이자 부담으로 다시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자영농이 속출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실패였다. 그럼에도 소작이라는 아프리오리에 사로잡힌 지식인은 누구하나 이를 비판하지 못했다. (下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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