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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Dec 03. 2019

짧은 서평: 11월에 읽은 책들 (1)

     


 『1947 현재의 탄생』


유대계 스웨덴인인 저널리스트의 논픽션. 마치 ‘세계’를 훑을 것만 같은 제목과는 달리, 책에서 다루는 ‘현재’란 어디까지나 서구세계의 오늘에 불과하다. 물론 이슬람세계가 비중 있게 다뤄지긴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더 큰 문제의 일부로서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외에는 인도와 동서 파키스탄의 분단이 곁다리로 등장하는 정도. 

 1947년 1월에서 12월까지, ‘세계’ 각지의 국가와 도시를 훑으며 ‘현재’를 만든 중요한 사건들을 훑는 저자의 시야에 서울과 평양, 도쿄와 베이징, 하노이와 자카르타는 들어와 있지 않다. 과연 병들어 죽어가는 조지 오웰이나 미국인 작가와 사랑에 빠진 시몬 드 보부아르, 새로운 패션을 창조한 크리스티앙 디오르보다 이들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이 덜 중요한가 싶지만, 비서구를 일종의 ‘악세사리’로 다루느니 깔끔하게 들어내기로 한 저자의 판단은 퍽 현명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꿀꿀함은 남는다. 어째서 서구, 구체적으로는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문제만을 천착한 이 책은 별다른 수식어 없이 ‘현재’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나올 수 있었을까. 만일 배경이 동아시아였고, 사건이 한반도의 분단이었다면 저토록 당당하게 ‘현재’를 선언할 수 있었을까. 서구는 자신을 구태여 ‘보편’이라 천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반면 비서구는 자기네 ‘특수성’을 이야기할 때조차도 서구를 의식해야만 한다. 차크라바티의 말마따나, 유럽의 지방화가 절실하다.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스웨덴어로 쓴 글의 영어 번역판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중역본임에도, 문장은 유려하고 우아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동아시아나 한반도의 ‘현재’를 만든 인물과 사건들을 엮어 이런 책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잠겼다가, 너무나 자연스레 ‘서구 명저’의 ‘동아시아/한국판’을 상상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역시 비서구는 결코 서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사족이지만, 유대인 문제에 ‘올인’한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전후 나치의 재편을 도모한 스웨덴인 페르 엥달이라는 점은 퍽 묘하다. 


『굿바이 편집장』     


 45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꺼운 책인데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저자 고경태는 <한겨레 21>과 <한겨레> 토요판(별도의 주말섹션이 아닌, 주간판과 구분되는 토요판으로는 한국 언론 최초라고 한다)을 성공시킨 베테랑 편집자다. 파격적인 기획을 대담하게 밀어붙이고, 이를 성공시키기까지 한 저자의 편집인생이 기자 특유의 간결한 문체에 힘입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의 기획이 하나같이 그 매체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끌어들임으로써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겨레> 토요판 1면은 전날 일어난 최신의 사건을 보도하는 통상적인 신문과는 달리 편집장이 중요하다 판단한 주제 하나를 대문짝하게 실었다. 전형적인 주간지의 기법으로, <한겨레 21>에서 오래 일한 저자의 경험이 녹아들었다. 초창기 <한겨레 21>을 스타덤에 올린 김규항과 김어준의 쾌도난담 역시 술자리에서 오고갈 법한 대화를 그대로 주간지에 실은 것인데, 굳이 따지자면 ‘활자화된 팟캐스트’라 할 수 있다. 

 매체 A에 다른 매체 B의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파격을 꾀한다. 퍽 일관적이라 할 수 있는 저자의 ‘파격’은, 이 책이 증명하듯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신문이 ‘신문 아닌 것’을 끌어들여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면, 굳이 신문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활자화된 팟캐스트’를 읽느니 그냥 팟캐스트를 듣는 게 낫지 않나? 성격이 전혀 다른 매체를 슬금슬금 끌어들이다보면, 결국 신문과 잡지 고유의 성격까지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활자의 종언을 더 이상 호사가의 공담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된 지금, 신문과 잡지 고유의 방식으로 혁신을 꾀할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저자의 이야기가 주로 아이템 개발이나 외부 필진과의 에피소드에 치중된 점은 아쉽다. 편집이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큰 가이드라인은 편집장이 정할지언정 결국 그 속을 채우는 건 기자들이다. 자신의 구상을 팀원들에게 설득하고, 때로는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화려한 편집장 역사에는 명민하고, 오만하며, 고집 센 기자들과 실랑이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하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라 일부러 뺀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저자가 실랑이를 벌일 여지 자체를 주지 않았던 걸까. 책을 읽다보면 어쩐지 후자일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PART 5 「내가 만난 편집장」에 등장하는 편집장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캐릭터가 겹친다. 좋게 말해 추진력 있고, 나쁘게 말해 오만하고 독선적이다. 편집장의 역할은 ‘조율’보다는 ‘지휘’인 걸까. 저자의 다른 책인 『유혹하는 에디터』를 읽으면 편집장의 또 다른 모습을 접할 수 있을는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Y는 이우학교가 망한 건 공동체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구태여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열아홉 살 때 처음 듣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석을 달고 있을 만큼 소중히 여기는 말인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도 이 금언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책의 주인공 김하나와 황선우는 잘 나가는 고급 지식노동자다.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능력 역시 뛰어나다. 요컨대, 이 둘은 굳이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도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그런 둘이 함께 살게 된다고 해서 이우학교처럼 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없어질 뿐.  

 책을 읽는 내내 참 부럽고 행복한 삶이다 싶으면서도, 나의 부러움이 김하나와 황선우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님 그냥 두 사람의 쩌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헷갈렸다. 역시 함께 살아가는 일의 아름다움(그리고 비루함)은 절박함에서 나오는 걸까.     



『소멸사회』     


 난 SF의 최대 매력은 ‘사고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가정에서 시작해, 끝에는 정교하고 그럴싸한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독자에게 지적 쾌감을 안겨주고 상상력을 넓히는 일이야말로 SF의 ‘소명’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소멸사회』는 내겐 실패한 사고실험으로 남을 듯하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도래한 암울한 205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가정은 허술하고 인물들은 도무지 그 시대 사람들 같지가 않다. 차라리 2010년대의 청년들이라 했다면 보다 그럴싸했을 것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인구가 줄어 ‘소멸’을 향해가는 마당에 청년들이 뭐 하러 한강에 배를 띄워 사는가? 그냥 무수히 널려있을 빈 집을 점거해 살면 되지.

 애초에 200여 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담아내기엔 너무 무겁고, 커다란 주제였다. 올해 나온 『대멸종』에 실린 단편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를 재밌게 읽었던지라 퍽 기대하는 작가였는데, 이 책은 굉장히 실망스럽다. 곽재식 작가가 이야기한, 너무 별로라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하고 이야기 고치는 연습을 해볼 수 있는 바로 그 정도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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