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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pr 09. 2019

'매끄러운 역사' 바깥의 '한뼘'을 펼치다

『한뼘 한국사』

 나는 소위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양한 시각에서 흥미로운 고민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척박한 진실’보다는 ‘풍요로운 오류’이며, 이를 위해선 보다 긴 시대를 다루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앙리 피렌의 『중세 유럽의 도시』, 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 아미노 요시히코의 『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 등, 내가 재밌게 읽은 책들은 하나같이 긴 시대를 아우르는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언제나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이영훈 선생에 대한 ‘빠심’을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 그의 평전을 쓰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 역시 선생의 악마 같은 스토리텔링 능력에 큰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 사건에 대한 ‘단단한’ 이야기보다는 긴 시대를 꿰뚫는 ‘허술한’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지라, 『한뼘 한국사』는 솔직히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책의 주제가 ‘낮은 곳에 있는/금기시 된/경계 밖의 존재’라는 것 역시 소수자 감수성이 그리 예민하지 않은 나의 자격지심을 건드렸고 말이다. 덕분에 9월 초에 책을 선물 받았음에도 차일피일 읽기를 미루고만 있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10월,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의무감에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럴 수가, 『한뼘 한국사』는 내 선입견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선한 책이었다. 필자들은 자그마한 사건의 시답잖은 의미를 밝히는데 집착하지도, 역사 속의 소수자에게 무조건적인 동정을 보내지도 않았다. 이들이 내게 보여준 건, 자칫 흘려 넘기기 쉬운 역사 속의 ‘한 뼘’에 얼마나 다층적이고 풍부한 의미가 깃들어 있는가였다.

 필자들이 속한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이하 만인만색)”은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맞서 만들어졌다. 허나 만인만색의 목적은 비단 “친일 교과서, 독재미화 교과서”에 대한 반대만은 아닌 듯하다. 필자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국정교과서를 넘어, 검인정제도로 상징되는 국가의 역사교육 통제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는 “국민 만들기”의 일환으로 역사교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고, 본디 울퉁불퉁한 이야기였던 역사는 국가의 입맛에 맞게 납작하고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만인만색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국가에 의해 납작해진 역사가 본래 갖고 있었던 울퉁불퉁함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이러한 필자들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얼핏 식상하다 생각할 수 있는 『한뼘 한국사』가 꽤나 절묘한 제목임을 깨닫게 된다. “한뼘”이란 교과서의 매끄러운 서술에 채 담기지 못한 채 삐죽 튀어나온 자투리 한 뼘일 수도 있고, 교과서에 한 줄로 표시된 사건에서 어딘가 미심쩍음을 느낀 우리의 생각 한 뼘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들은 교과서가 외면한 “한뼘”을 펼쳐, 그 작은 자투리가 얼마나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1925년 예천사건을 다룬 최보민의 글은 백정과 하층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통해 ‘을’이란 하나의 입장을 공유하는 실체가 아니라,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축하는 다양한 ‘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아가 당시 언론과 사회운동세력이 예천사건을 어떻게 평가하였나를 살펴봄으로써, 사건의 복잡다단함을 잘라내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매끈한 서술을 만들어내는 (좌우를 막론한) 엘리트의 오만함을 넌지시 비판한다. 

 권혁은은 베트남전 특수의 군 계급별 경험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김추자의 노래에 등장하는, 월남에서 돌아온 군인이 왜 ‘병장’이 아닌 ‘상사’ 이상일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한다. 임광순의 글은 박정희 정권의 공장새마을운동이 노동자를 어떻게 억압했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노동권이 극히 제약된 시대에 노동자들이 역으로 이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창구로 전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처럼 필자들의 글은 하나의 사건을 다루면서도 풍부한 이야기를 남아내고, 약자의 역사를 복원하되 이를 박제화하지 않는다. 

 여러 명의 필자가 쓴 글을 엮은 책답지 않게, 각 글의 ‘편차’가 거의 없다는 점도 상당히 놀라웠다. 문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글이 곱고 단정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퍽 즐겁게 읽었고, (내가 그렇게 못 쓴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다. 모든 글이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제가 조선을 통치한 기간을 ‘식민지시기’로 지칭하는 등, 표기의 통일에 신경 쓴 부분도 좋았다. 단순히 각 필자들이 쓴 글을 합친 ‘모음집’이 아니라, 만인만색의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가며 함께 만든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달까.

 개인적으로는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좌와 우, 제도권과 대안교육을 막론하고 한국의 역사교육이란 곧 ‘매끈한 역사’를 배우는(외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소위 ‘진보적인’ 역사 교육은 약자의 입장에서 다시 쓴 역사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허나 이 역시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만들어내고 여기서 벗어난 생각은 쉬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역사교육과 큰 차이가 없다. 

 나는 학생들이 역사를 울퉁불퉁한 모습 그 자체로 접했으면 좋겠다. 전문가들이 보기 좋게 다듬은 매끈한 역사는 단순한 암기 이상이 되기 어렵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복잡한 역사를 마주하는 건 처음에는 어렵고 막막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이어가며 자기 나름의 설명을 만들어볼 수도 있고, 기존의 설명이 외면한 소수자의 삶에 주목할 수도 있다. 양 쪽 모두 의미도 모른 채 단순히 사실을 암기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암기식 교육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여하간 『한뼘 한국사』는 학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의 울퉁불퉁함을 마주하게 해주는 좋은 안내서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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